아니 에르노를 만나다.
모든 장면들은 잊혀진다.
오늘 우리가 만나 아르에르노의 '세월'을 함께 읽고 토론했던 장면들도 잊혀지겠지. 기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독서모임의 이번 책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아니에르노의 ‘세월’이라는 책이다.
아니에르노는 말한다. 어떤 시대이든 형언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그 기록에는 어떠한 '나'도 없고,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기록하는 아니에르노는 1941년부터 2006까지 그녀가 살아낸 세월들을 자전적 이야기로 펼쳐낸다. 세월 속의 '그녀'는 아니에르노 자신인 듯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의 여성을 대표하는 '그녀'이다.
모든 장면들이 잊혀지기 전에 그녀는 낡은 앨범 속에 사진들을 한 장씩 꺼내 과거를 회상한다. 사진에 찍힌 그녀의 모습을 묘사하며 그 시대를 살았던 이야기들을풀어낸다. 작가는 소설 속 '그녀'를 통해 하나의 삶만을이야기하거나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의 세월에나라와 정치와 사회문화가, 여성의 삶이 맞물려있다.
더 이상 투표에 어떤 희망도 걸지 않게 하는 프랑스 정치에 대한 체념, 푸틴의 시대가 열린 러시아와 주변국에 뿌리를 거세게 확장해 나가는 미국, 전쟁과 테러를 지켜보며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안도할 수 없는 현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푸틴이 '핵 카드'를 또 꺼내 들었다는 뉴스가나오가 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상 가운데 가장 느린 것은 변하지 않는 학교 교육이며, 하루가 무섭게 쏟아지는 새로운 상품들의 유혹에 못이겨 경쟁하듯 물건을 사들이는소비문화까지.
아니에르노가 거쳐간 세월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의 발달이 우리의 현재를 소멸시킨다.'며 현란한 기술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소설 속 소녀가 할머니가 되기까지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성적 호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사춘기 소녀가 억압된 성문화 속에서 은밀하게 했던 행위들, 자연스럽게 콘돔을 소지하게 되지만 그것의 사용을 거부하며 자유롭게 성적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성문화의 변화. 주방에서 몰래 줄 서서 하던 낙태가 허용되면서 여성이 삶에 대한 선택권을 행사하게 된다.
결혼과 육아에 그녀의 개인적인 계획(그림, 음악, 글쓰기)이 멀어지는 것을 보는 우울함을 가정의 계획에 일조하며 얻는 만족감으로 보상받는 것, 가정에서 잠시 자유로워질 때의 행복감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끼는 그녀는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다 자란 아이들을 보며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다'라고 말할 때, 몇 년 뒤에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
보는 이의 관심분야에 따라 책에서 조명하는 부분이 달랐다. 심선생님은 내가 쓱 훑고 지나간 역사와 정치 부분에 꽂히셨다. 선생님의 보충설명으로 책에서 놓친부분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책은 조국의 '법 고전 산책' 어때요?
468페이지 분량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서문을 여는 책을 추천하시다니. 선생님의 호기심을 따라가라면 나는.... 책 분야를 바꿔야 되나 잠시 생각했다.
과거의 '메모'들을 한데 모아 언젠가 시대의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작가의 다짐이 '세월'이라는 작품을 탄생케 했다고 한다.
기록과 기억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억은 선택적이지만 기록은 쓰는 행위로 자기 해방에이르는 길이 된다는 심선생님, 기록은 기억을 붙잡아 두기 위한 일로 개인이든 사회이든 기록하는 것은 각자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는 나, 한평생 살아온 기억들만 불러내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지 않겠냐는 진 선생님 말에 우리는 결국 '글 쓰기'에 다시 주목했다
일주일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송쌤은 쓰면서 더 깊이 사유할 수 있게 됐다고 하지만 그녀는 평소 하는 말을 글로 그대로 옮겨 적어도 될 만큼 말이 훌륭하니 계속 써나가면 된다.
아니에르노의 시대를 관통하는 깊은 통찰에 모두가 감탄했다. 역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다르다며, '두 번은 읽어야 될 책'이라고 총평했다. 완독의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책의 시작이 만만치 않네요. 엉덩이의 힘으로 읽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완독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할 것 같네요.'
'분명 읽었는데, 어느 순간 같은 부분을 또 읽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다시 봐도 새롭더군요..'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한 시름 놓았다. 너무 훌륭한 책이지만 혼자였다면 읽다가 조용히 덮어두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책이든 100페이지를 일단 넘겨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진 선생님이 말했다. 100페이지를 넘기기까지 우리는 서로 토닥이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께 완주했다.
#세월#아니에르노#프랑스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