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희 Jan 01. 2023

두 사람의 건투를 빈다.

가벼운 인연은 없다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어떻게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사람들은 충분히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소소한 이야기가 나에게 울림을 줄 때, 나는 그 사람을 주목하며 그 감탄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진다.

 

얼마 전에 제주도로 회사 워크숍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전국의 교육담당자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단체 관광버스를 타자마자 우리는 이미 정해진 조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나는 6조였고, 우리 조는 7명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한 팀이 되어 2박 3일 동안 같이 다니게된다.


첫 만남의 어색한 공기를 깬 건 50세의 박주임이었다.

"나는요~. 본청에서 근무해요. 예산 담당인데 어쩌다 보니 같이 오게 됐네요. 하하하." 마른 몸에 파마머리를한 그는 발그레진 얼굴로 자기소개를 한 뒤, 조원들의이름을 물었다.

말하기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들리는 건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하와이로 가려던 신혼여행을 어떻게 제주도로 바꾸게 되었는지, 그가 반 평생동안 다녔던 여행지와 좋아하는 술을,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요~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무조건 4시에 퇴근해요. 퇴근길에 장을 봐서 집에 가 저녁을 차려 놓고 와이프를 기다려요. 내가 손수 차린 저녁에 매일 막걸리 3병씩 먹는 게 낙이예요~. “

경찰청에 근무하면서 매일 4시에 퇴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그가 경리 업무를 '15년째 하고 있다'는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루 8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 일찍 출근해서 바지런히 일하면 그만큼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가정에 무척이나 충실한 우렁남편인동시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실한 회사인이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사려니 숲길을 함께 걸었다.

서로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참나무 숲 사이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었다.

숲 길을 걷고 있는 그의 마르고 곧은 몸이 꼭 참나무 같아 나는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속 뒷모습이 나무와 어우러져 우리 조원들은 그에게 '뒷모습이 청년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요~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이 그랬어요. 뒤에서 보면 순정만화 캐릭터인데 앞에서 보면 불량만화라고요. 허허허".   '나는요'로 리듬을 타며 시작하는 그의 말은 흡입력이 강해 듣는 사람을 빨아들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유려한 말솜씨를 지녔지만 유독 외모에는 자신 없어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자기 사진이 몇 장 안 된다는 말에 나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 그의 찍사가 되어주기로 했다.


내게 없는 여러 면을 가진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5년 동안 회계 업무를 해 오며 자신만의 경험과 노하우를 쌓았고, 그걸 바탕으로 지금은 강의릉다닌다. 연말 결산이 있는 가장 바쁜 시기에도 이제 8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주말이 되면 그의 자유는 날개를 단다. 혼자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해돋이를 보러 가고, 영동으로 와인기행을 훌쩍 떠나기도 한다. 전국 방방곡곡, 동남아부터 유럽까지 유명한 여행지는 안 다녀온 곳이 없을 정도다.

몇 년 전에 심장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술을 끊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취향도 확실하다. 오늘 마실 술을 내일로 미루면 안 된다! 는 그를 보며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가 확실하니 승진에 구애받을 필요도, 상사의 눈치를 볼필요도 없다. 자신이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무척 강하다고 말했지만, 오늘 처음 만난 우리들에게 누구보다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보였다. 조르바만큼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다음으로 나의 주목을 끌었던 사람은 '남사장'이었다.

남 씨 성을 가진 그는 30대 초반의 새침한 서울남자였다. 예산을 집행하려면 그에게 허락?을 맡고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어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이, 계급을 망라하고 상사들에게도 '남사장'으로 불렸다.   

그는 자기가 진짜 사장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자기보다 족히 열 살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도 말을 짧게 했다.

"그랬어? 아니 왜?,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요'자는 어디로 잘라먹고, 자기 마음 내킬 때만 붙였다.

원래 예의가 없는 사람인 건지, 아니면 친분이 두터워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건지 그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내가 민망해졌다.


어쩌면 그의 짧은 말투와 남사장이라는 호칭이 잘생기고 새침한 서울남자의 벽을 허물어 줬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말투는 그를 다소 엉성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고, 자신이 남사장이라고 불리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모습은 귀여웠다.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의를 생략한 새침한 태도의 남사장이 갑자기 영상통화를 한다. 100일을 갓 넘긴 그의 딸이 화면 속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그는 더 바보가 된다. 결혼을 해서 아기가 있다고? 심지어 아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더 많단다고 한다.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을 텐데, 남사장 완전 사랑꾼이네. 갑자기 남사장이 인간미 넘치고 진실되 보였다.


첫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다들 술 한잔씩 하고 있을 때, 남사장 혼자 음료수를 마셨었다. 승진시험을 준비하고 있어 술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그날 호텔방에서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워크숍에 와서까지 공부를 하다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남사장의 집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날인 둘째 날 저녁, 하루종일 단체관광에 지친 나는 빨리 호텔방이 들어가 쉬고 싶었다. 제주도에서 해외에서나 할 법한 패키지 관광을 하게 될 줄이야. 어서 빨리 포근한 호텔 침구에 몸을 누이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퇴직을 앞둔 대 선배와 방을 같이 써 어차피 이룰 수 없는 로망이었다.. 심지어 티브이를 켜놓고 주무시기까지 했다.)


로비에서 각자 방키를 들고 헤어지려던 찰나에 남사장이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 그냥 잘 거예요?"

"엥...?"

"우리 이대로 그냥 잘 거냐고요. 오늘 마지막 날인데"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우리가 언제 만났냐는 듯 잊고 지낼 것 같은데 우리에게 '마지막 밤'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남사장 옆에 서 있던 박주임이 나섰다.

“나는요~ 가볍게 맥주 한잔 마셔도 좋고, 아니면 커피 먹어도 돼요. 어디로 갈까요?”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짐만 놓아두고 다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안녕 나의 호텔 침대여..

치킨집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했던 2박 3일은 각자에게 어떤 인연과 의미를 남겼을까.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어쩌다 마주치면 무척 반갑겠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혀질 관계가 아닌가? 물론 그럴 확률이 크다. 그렇지만 박주임과 남사장은 인연이 함께하는 ‘순간’에 집중했고,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했다. 이토록 따뜻한 사람들이라니.

그들의 온기가 마음에 닿는 순간 내가 부끄러워졌다.


치킨집에 익숙한 얼굴들이 일찌감치 자리하고 있었다. 아쉬움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였구나. 마지막 날에 그낭 자러 들어갔더라면, 헤어질 때  마음이 그리 헛헛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별 감흥없이 돌아섰겠지.

그 날 박주임은 거나하게 취했고, 남사장은 콜라를 홀짝이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매력적인 두 사람.

그들의 건투를 빈다.




                    

작가의 이전글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