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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Jan 21. 2023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새해 인사에 대한 단상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 더 자주 보자. 너는 나에게 일당 백인 후배야'

친하게 지내는 회사 선배가 커피 쿠폰과 함께 먼저 새해인사를 건넸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좋았을 걸. 한 발 늦어버렸다. 


'항상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 줘서 고마워요. 선배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한 살 더 먹었지만... 우리 같이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자고요.' 

먼저 연락해 준 선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바로 답장을 보냈다. 


때로는 말보다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게 편할 때가 있다. 말로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새해인사는 영 어색하다. 만약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저렇게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2022년의 마지막 날 퇴근하면서 회사 동료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신 '새해 복 많은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나면 그다음에 이어질 말이 딱히 없기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에게 12월 31일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보다 그저 어제도 오늘도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살아낼 '하루'에 불과하다. 1월 1일은 어제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할 '내일'일뿐이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므로 새해를 맞는 일에 유난스럽지 않다. 


그래도 나는 사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할 정도는 못되어도 실망은 시키지 말자는 생각으로 인사를 챙긴다. 일단 양가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리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한다. 카카오톡  채팅 목록에 1년 내내 유지되고 있는 단톡방에도 새해 인사를 올려본다. 새해의 첫 번째 과제를 해치우고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를 뒤적이다 2년 전에 내가 새해인사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발견했다. 


그때도 선배는 나에게 먼저 새해인사를 했었다. 선배와 나는 오히려 새해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내가 더 무심했던 걸까. 인간관계에 수동적인 나는 지인들에게 먼저 연락해 안부를 물으며 살갑게 다가가지 못한다. 친구들은 그런 나에게 연락 한번 없다며 서운해했었다. 핀잔을 받을 때가 행복한 줄 그때는 몰랐었지. 역시 사람은 해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구나... 

2년 전의 나를 돌아보며 서랍 속의 글을 꺼내어 본다. 



2020년 마지막 밤, 남편과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회사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민희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너 주변사람들에게 새해 인사 했니?'

'아니요. 아직이에요.' 

'너도 빨리 주변 분들한테 새해인사 해라. 지금 민숙선배는 위부터 아래까지 새해 인사를 싹 돌리고 있대. 그래서 나도 일단 생각나는 사람한테 먼저 하는 중이야. 너도 관리(사내정치) 좀 해야 되지 않겠니?'

인맥 관리는 물론 사내 정치에 능통한 회사 선배가 해가 바뀌기 무섭게 상사부터 후배들까지 차근차근 새해 인사를 해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에게 연락을 해 온 선배와 나는 비슷한 성향이라 사내정치에 젬병인 데다 먼저 나서길 싫어하는 타입이다. 

'나도 올해는 새해 인사를 먼저 건네 볼까.' 술김에 그리고 선배의 독촉에 마음을 고쳐먹기로 하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누구에게 어떤 새해 인사를 해야 할까?' 카카오톡의 친구 목록을 한번 훑었다. 

'잘 보일 사람이 없으니, 딱히 인사할 만한 사람도 없네. '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인사는 내키지 않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틀에 박힌 새해 인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른에게 올리는 복 덕담인가, 과연 어떤 게 복일까, 모든 좋은 에너지를 모두 담고 있는 함축적인 말일까, 저 말이 과연 상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왠지 모를 거부감마저 들었다. 


A는 평소에 너무 연락을 안 해서 안 돼, B는 새해인사를 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할 말이 없어서 안 돼, 그럼 C, D 한 테나 해야겠네. 하고 점점 범위가 좁혀갔다. 그러다가 정말로 내가 보고 싶은 몇몇이 떠올랐다.  참 인사말이 별거라고 나도 참 많은 생각을 한다. 


결국 새해인사 목록으로 추려진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뜬금없이 연락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그런 사람들. 감성에 더 깊게 젖어들기 전에 텔레비전을 켰다. 코로나19로 40여 년 만에 제야의 종 행사가 취소되고, AI로 어색하게 만들어진 종을 치는 영상이 새해를 알리고 있었다. 오늘은 늦었구나. 여전히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보고 있던 나는 소중한 친구 한 명에게 마음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 새해는 어떤 결심을 하면 안 돼!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그 간 미뤄뒀던 소중한 친구 한 명에게 카톡으로 마음을 전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 친구는 미국에 사니 새벽에 연락을 해야 하므로 바로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이제 40이 되어가니 새해 결심도 섣불리 하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새해가 되면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사놓은 영어책만 몇 권된다. 새해 다짐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변할 사람은 새해가 아니라 오늘이라도 변한다. 그래도 새해니까 한 가지는 적어두자. 올 해는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고 싶다. 


2년 전에는 참 치기 어렸구나. 서랍 속의 글들을 하나씩 꺼내어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얼마 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노래를 발견했다. 장기하의 '새해 복 만으로는 안 돼'라는 노래로 가사가 인상적이다.  '새해 복 만으로는 안 돼~네가 잘해야 돼~ 노력을 해야 돼~' 새해 인사가 주는 형식과 의미에 대해서 나만 생각한 것이 아니구나. 


내일이면 2023년 설날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또 인사를 드려야지. 내 스스로에게는 법륜스님이 하는 말을 해줘야겠다. 새해에는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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