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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Jan 24. 2023

영하 13도

스타벅스 모닝커피와 축구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이틀 내내 잠을 푹 잤더니 아침 5시에 눈이 떠졌다.

모든 것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던데, 잠에도 적용되나 보다. 전날 낮잠까지 잔 남편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사부작 거린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와 커튼을 걷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밤 사이 내린 눈이 하얗게 새벽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맞이하는 설경은 감탄과 함께 나를 설레게 한다. 낭만일까 동심일까. 어서 밖에 나가 눈을 밟으며 아침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아침으로 먹을 사과를 깎아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나 스타벅스 오픈 시간에 맞춰서 커피 마시러 갈 거야. 걸어서"

"이 날씨에? 걸어서?"

"응.. 시원하잖아."

"난 축구 간다."

"지금..? 이 날씨에?"


우리 부부에게 날씨와 시간 따위는 상관없었다. 남편은 하늘하늘 거리는 얇디얇은 하늘색의 축구복 반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과연 영하 13도의 날씨에 저런 숏 팬츠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나는 숨이 죽어버린 내 점퍼 대신 최근에 구입해 충전재가 빵빵하게 채워진 딸의 패딩을 꺼내 입으며 말했다.  


"바지 안에 쫄바지라도 입지?" 

매서운 바람에 피부가 터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남편은 쫄바지 대신 무릎 보호대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더니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너 그러다 미끄러진다."


'누가 할 소리?'라는 대답은 생략했다. 

과연 눈 쌓인 길을 얌전히 걸어가는 나와 눈 쌓인 운동장 위를 빠르게 달려가며 축구를 하는 남편 중에 누가 더 미끄러질 확률이 높은 걸까. 

그럼에도 나를 걱정해 주는 남편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의 미끄러짐을 우려하며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따뜻하고 안온한 집을 두고 추위를 찾아가는 우리 부부는 참 유난스럽고 이상한 사람들이다. 


모지를 뒤집어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도 칼바람이 얼굴로 파고들었다. 바람을 피해 보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는데 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이가 지긋하신 경비아저씨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죄송한 마음에 아저씨께 더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얗게 눈 덮인 풍경과 함께 싸리비를 들고 눈을 치우는 경비아저씨와 기계를 타고 길 위에 쌓은 눈을 걷어내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보였다. 


남편과 내가 걱정하던 그것. 

누군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이른 새벽부터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어 오늘도 우리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 누군가는 감탄하며 누리고 싶은 설경이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노동이 될 수 있음에 미안하면서도 감사했다. 


오픈 시간에 맞춰 가는 김에 오늘 스타벅스의 1번 손님이 되어 볼까. 뜬금없지만 한 번쯤은 첫 번째 손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어느새 추위도 잊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할 무렵 충남대학교 병원 옆 축구장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 패스패스"

풋살장에서 조기축구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위 아래 겨울 츄리닝에 귀마개를 맞춰 하고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공을 차고 있었다. 얇은 홑겹의 숏 팬츠를 입고 온 몸으로 바람을 맞을 남편을 생각하니 내 허벅지가 시렸다. 

'그래. 아직 축구를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안 됐으니 잘 모를 수도 있지.'

다녀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입고 왔나 물어봐야겠다. 


부지런히 걸어간 나는 스타벅스의 일 번 손님으로 주문을 넣었다. 그런데 내가 예상한 주문번호 1번은 되지 못했다. 분명 첫 주문인데 왜 24번부터 시작하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너무 사소한 질문 같아 묻지 않았다.  

스타벅스만의 셈 법칙이 있겠지. 

커피 맛보다는 공간을 사랑하게 되는 스타벅스

그렇게 오늘 나는 영하 13도의 날씨를 뚫고 30분을 걸어 스타벅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충만해지는지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과 함께. 


고요해질 줄 알았던 창 밖은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은 내 호출에 응해 주었고, 차를 가지고 데리러 나왔다. 집에 돌아가며 그는 축구하는 동안 얼마나 추웠는지 이야기했다. 다른 이들은 롱패딩을 입고 공을 찼다고 한다. 


"미쳤어 미쳤어 이런 날씨에 축구를 하고"

내가 아니라 남편이 한 말이다.

당분간 강추위가 몰려오는 휴일의 이른 아침에는 집을 혼자 나서야 할 것 같다. 아니 오늘 입었던 딸의 롱패딩을 벗어주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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