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에 더 관대해질 것
아빠 생신을 맞아 친정에 다녀왔다. 집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커피를 마시러 카페를 찾아갔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도 친구들을 만날 때면 종종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내 고향인 부여는 관광지라서 도시 못지 않게 카페가 많이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네 카페가 시골 어르신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
집에 갈 때마다 부모님께 차를 마시러 나가자고 한다. 그러면 엄마는 '뒷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다더라' 면서 나에게 신상 카페를 소개한다.
오늘 엄마의 추천은 높은댕이라는 상호의 한옥카페였다. 2층으로 지어진 한옥 건물은 앞마당에 널찍한 정원을 품고 있었고, 입구에는 나이가 족히 백 년은 돼 보이는 느티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뭘로 드실래요?
'카푸치노가 맛있지?'
아빠는 카푸치노를 선택했고, 엄마는 '네가 저번에 주문해 준 그 커피(바닐라라테)'를 고른다. 이제 부모님도 각자의 커피 취향이 생긴 것 같아 반가웠다.
2층에 테라스에 자리 잡고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에게서 소리가 났다.
"꺼~억"
아 뭐야. 엄마의 트림소리다. 나에겐 익숙한 엄마의 소리지만 남편 앞에서 그 소리를 들으니 민망했다. 나는 얼른 엄마의 허벅지를 살짝 찌르며 조심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한 번 시작했다 하면 연쇄적으로 나오는 그 힘찬 소리를 알기에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야 한다.
"괜찮아~"라며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부끄러움 타지 않고 항상 당당한 엄마의 모습이 좋긴 한데, 이럴 때는 아니다.
예전부터 위장이 좋지 않은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트림을 잘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정색을 했지만 엄마는 늘 한결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우리의 반응은 게의치 않아했다. 이제 나이가 드셨으니 오죽하랴. 참고 싶어도 몸에서 제어가 안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해가 갈수록 내 의도와 다르게 몸의 구멍들이 종종 긴장을 풀어버린다. 눈물샘도 그렇고, 꽃가루가 날릴 때면 콧물이 줄줄 흐른다. 예전보다 음식도 잘 흘리는 것 같고, 가끔은 침도 새어 나오고.. 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부모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유로운 일요일의 오후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나는 노트북을 들고 아파트 주민 카페로 향했다. 밖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때마침 잘됐다 싶어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딸, 우리 엄마보다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엄마였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모녀는 자리에 앉아 함께 빵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엄마에게서 소리가 났다.
"거~억"
빵을 하나 다 드신 엄마분이 시원하게 트림을 하신 거다. "아이~진짜" 딸은 나를 의식해서인지 민망해 어쩔 줄 몰라했다. 계속 있다가는 더 민망한 일이 벌어지기라고 하는 것 처럼 딸른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요"
오붓해 보이는 모녀의 시간이 깨지는 것이 싫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모녀는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민망하지만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모녀의 딸과 나는 모종의 교감을 나눈 것 같은 눈웃음을 주고 받았다. 나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아서 그렇다고 말한 것뿐인데. 우리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니 더 괜찮았는데.
노화가 오면 신체의 기능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체면이라는 명목 하에 어르신들을 더 관대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낮에 본 엄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왼쪽 눈앞에 깊게 파인 주름 사이에 눈물 같은 투명한 액체가 미세하게 고여있었다. 나는 분명 빛나는 액체가 보이는데, 엄마는 계속 닦아내지 않았다. 어떤 감정으로 흘러나온 눈물이 아니라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은 걸까.
다음에도 엄마는 분명 트림을 할 거다. 눈물샘이 열려 눈물도 살짝씩 흐르겠지. 그때는 허벅지를 찌르는 대신 얼른 티슈를 건네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