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 같은 문제, 같은 관계의 내용도 카르마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전혀 엉뚱하게 해결하려 하고 길 없는 길로 가게 되는 것. 그것이 카르마 타임 중에 불행이라고 말하는 어둠의 시간이다. 카르마 타임에 걸리거나 갇히게 되면 이때는 대체로 알고 있는 인과법이 고장 난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지난 시간의 자신이 모든 행위로 지은 업보를 있는 그대로 받는 시간이기에 복으로 받기도 하고 형벌처럼 느끼는 결괏값으로 받기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선과, 악과 이런 식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보통의 일상을 보내지만 카르마 타임이 걸린 기간은 발걸음이 발바닥에 끈적한 게 붙어서 걷는 것처럼 걸음 자체가 무겁다. 마음을 먹어도 쉽지 않고 가능성이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는 세상을 왜곡해서 볼 수밖에 없는 안경을 쓰게 되는데 그 안경을 썼다는 걸 인식하기도 힘들고 썼다는 걸 인식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도 못 내곤 한다.
사람은 대체로 어릴수록 세상이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가볍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세도 있다. 그렇게 기세가 만만하기에 세상을 보기에 바쁘지 자신을 돌아보기에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운수까지 좋으면 더더욱 자신보다 밖을 향하기 쉽고 자신의 가장 큰 지붕이자 울타리인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그 방패로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어느덧 나의 기세뿐 아니라 부모님의 기세가 약해지고 나이가 들만큼 든 분들은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 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바라는 대로 된다 한들 내가 생각했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연륜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연세가 있을수록 연말연시 눈 밝은 누군가를 찾아 앞날을 물어보곤 하는 게 단순히 아는 게 없고 마음이 허해서만은 아닌 것이다. 혹시나 모를 누군가의 지혜에 귀 기울이고 싶은 인간 이전의 영혼자리에서부터 궁금한 부분일 뿐이다. 카르마 타임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그렇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에 이런 잔잔한 글을 읽을 수가 없고 잔잔한 글을 쓸 수 없고 온 힘을 다해 겪어내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평소에 어떻게 하면 카르마 타임을 피하거나 당하게 되는 결괏값을 좀 달게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주인, 심연에 가장 맑게 빛나는 양심자리가 있다. 그 자리가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하게 된다.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근원자리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면밀히 관찰하고 심판한다. 아주 가끔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다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아주 어린 영혼이 아니고서야 개인의 영성은 대체로 맑고 밝다.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순간순간 자신을 낱낱이 발가벗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게 강박증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자기반성적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 자신이 앞으로 하는 행위가 전반적으로 수정이 된다. 그러면 계속해서 모르고 짓는 업을 막을 수 있다. 결괏값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경우 자책감을 가지고 불편한 감정을 계속해서 가지게 되는데 그게 일시적으로 우울증이나 신경쇠약증으로 나타날 수는 있으나 행동하지 않고 막음으로써 더 크게 받아야 할 업장을 막게 된다.
또 하나는 자신이 놓여있는 공간을 정비하는 것이다. 다양한 공간을 정비하는 방법이 있지만 기운적으로 볼 때 순환하는 곳을 먼저 정돈해야 한다. 현관, 창문, 베란다 배수구, 싱크대 배수구, 화장실, 휴지통을 가장 먼저 정돈해야 한다. 다 하고 여유가 된다면 창고 정리를 하면 쓸데없이 쌓여있는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기에 좋다.
그렇게만 해도 기분이 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게 관점이 바뀌면 다음은 조언이 필요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곳을 하나씩 수정 보완해 가면 된다.
마지막으로는 겸손하게 감사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행복에 겸손하게 감사하고 오늘 하루의 불행에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감사를 입에 달고 마음속 깊이 이해될 때까지 새겨보자. 언제나 착한 사람도 없고 모든 부분 완벽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늘 내게 온 인연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렇게 조그만 것들이 닥쳐오는 카르마 타임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지 코웃음 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옷도 사실은 작은 섬유가 꼬여 옷감이 된다. 옷감을 잇는 작은 바느질 한 땀 들이 입체를 만든다. 촘촘히 박힌 바짓단을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생각 보다 하나, 두 개 가위질 했다고 해서 풀리지 않는다. 작은 바느질 한 땀도 풀을 붙여놓은 것 마냥 단단할 때가 있다. 하물며 옷감도 그런데 작은 변화 하나가 분명히 카르마 타임을 바꿀 수 있다. 카르마 타임이 오더라도 생각보다 유쾌하게 받을 수 있는 내가 되기도 하고 크게 받을 일이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로 조금 덜 아픈 값으로 도착하기도 한다.
막상 발 밑에 힘든 카르마가 도착할 때는 작은 호미정도로 안될 수가 있기에 틈틈이 자신을 돌아보고 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