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전시를 마쳤고 그 그림들이 다시 집으로 도착했다. 마침내 전시가 신문에도 실리는 기쁨을 맞이했다. 친정엄마에게 나의 성취의 기쁨을 알렸다. 마침 엄마는 엄마 친구분들과 같이 계모임을 가고 계셨다. 간단하게 내 상황을 전하고 끊었다. 그 계모임을 끝내고 다시 엄마가 전화가 왔다.
대뜸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줄 수 있냐고 하셨다.
돈을 줄 테니 '해바라기 그림'을 작게 그려줄 수 없냐고 사람들이 묻던데? 난 대충 바쁘다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난 사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림은 기운이 묻어난다. 그 그림에 정말 그 화가의 마음이 묻는다. 최대한 좋은 감성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소진하고 나면 나도 사람인지라 기운이 빠진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을 담는다.
그분들도 나름 나를 위한다는 가식적인 인사치레에 마치 " 너 기도 매일 하던데 내 기도 좀 해줄래? 너 기도 잘하잖아~ 내가 돈 줄게~! "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 말을 또 덥석 나에게 전달해 주는 엄마가 참 답답했다.
난 엄마의 친구분들에게도 마음이 상했지만 엄마에게도 마음이 상했다.
엄마도 물론 나에게 눈치 보면서 물어보긴 하셨다. "네가 그런 그림 안 그린다는 거 아는데...."
마침 졸업전시를 준비했던 학부 때가 생각이 났다. 졸업전시 이후 개인전을 바로 하는 선배님들이 계셨는데 그때 지인분들이 그림을 한 점씩 사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완판을 했다며 자랑하는 모습이 기억이 났다.
난 그 정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와! 너 전시했구나 그림 나중에 하나 사주고 싶네~" 정도면 족했다.
그 마음이면 난 더 바랄 게 없었다.
애초의 나는 내 가족들에게도 나의 친척들에게도 쉬쉬하고 나대로 몰래 전시를 한 거였다.
어차피 예술작품 관람 문화에 대한 방식과 상식은 다들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전시 의도는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다가가고 먼저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가족들의 단결력이 좋아서 서로 사주는 모습도 참 좋지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내 개인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철저히 나도 배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 전시 그림을 사준다는 게 아니라 해바라기가 '돈'을 끌어와준다는 기복적인 마음으로 그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참 여유가 많아서 독박 육아를 하며 시간이 남아서 그림을 그리는 게 절대 아니다.
잠을 줄이고 내 아이에게 온전히 다 갔으면 좋을 마음까지도 조금 빚내어 도전하는 거였다. 남편의 회사도 불안정한 요즘 나의 커리어에 하나씩 도전하고 살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였다.
나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한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바라기를 그려줄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해바라기는 죄가 없다. '해바라기'는 내 사심으로도 그려보고 싶은 예쁜 꽃 중 하나였다.
다만 그 해바라기를 부탁하는 그 친구분들의 '의도'가 참 싫었다.
내가 어떤 상태에서 그리을 그리는지 어떻게 과정에서 나오는지 엄마의 친구분들은 모른다 쳐도 친정 엄마만큼은 그 마음을 알길 바랬다. 난 조심스럽지만 엄마에게 그려줄 수 없겠다고 말씀드렸고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렇게 부의 상징이자 최고 작가인 고흐의 대표 작품이기도 한 '해바라기'는 참 불편하게 내 마음에 숙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