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작업실
'착한 딸'로 자랐다.
엄마는 아니라고 인정 못하시겠지만 내입장에서는 그렇다.
나는 존중을 받았고 당연히 귀한 보살핌으로 이만큼 성장했다. 세심하게 옷과 준비물, 그때그때 성장할 때마다 마음상담도 참 많이 했었다. 이랬던 내가 참 많이 삐뚤어져있다. 20대 중반의 나는 그래도 엄마에게 그런대로 참 편하고 착한 밝은 자리의 딸이었다. 나도 한참 부족한 입장인데 우리 가족에게는 내가 빛이자 칭찬거리였다.
서울생활을 하고 있을 때 3개월에 한 번씩 세상 편한 복장으로 집에 갔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나의 복장을 보고 앞서 걱정하고 나의 삶을 짐작하곤 하셨다. 그래서 다음 내려갈 때는 세상 잘 나가는 딸 모습으로 반질반질 꾸며서 내려갔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님은 한편으로는 안심하셨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시기도 받았다. 이 부분은 정말 교묘해서 나중에 한번 언급할 예정이다. 그렇게 우리집은 딸만 행복한 집이 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그런식으로 항상 칭찬을 했기 때문에 그 평가를 곧 믿게 되었다.
"야~ 너는 참 속 편하겠다.", "너는 너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사니까 참 좋겠다~"
부모님도 나름 행복한 일상을 사셨지만 내게는 늘 고되고 힘든 모습을 보여줬기에 내 밝은 모습은 점점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마치 우리 집의 모든 복을 내가 빼앗아 가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늘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없는 살림에 서울살이를 이만큼이라도 해내는 게 대견했던 모양이다. 여러 지역을 거쳐 강남에서 학원일을 했을 때는 나는 참 힘들었지만 부모님은 참 뿌듯해하셨다. 나는 나대로 빨리 자립을 하고 싶고 소박한 꿈을 꾸었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께 용돈을 주고 싶다고. 당당하게 내가 돈 벌어서 일정 금액을 용돈으로 드리고 싶었다. 그런 나의 사기가 너무 충만해서였을까? 그런 마음을 앗아가는 사건들이 자꾸 발생했다. 딸로서 착하고 싶었는데 적어도 한 부분에서 만큼은 착하고 싶었는데 자꾸 멀어져 갔다.
지난 수없이 많은 돌봄이 무색할 만큼 자꾸 자존감에 상처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앞가림할 돈을 빼서 부모님을 크고 작게 챙긴 대가로 그 당시에는 세상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냥 '나 좋아서 준 일'이 되어있었다. 내가 딸로서 사드린 마음에 순수 사랑이 아니라 자부심이 섞여서였을까? 지금 와서 보면 자식이 자식으로서 부모님한테 베풀고 뿌듯한 자부심이 뭐가 문제일까 싶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많은 부정적인 간섭형 돌봄을 당하고 나는 뒤틀려버렸다. 부모님의 신화를 참 많이 내려놓게 된 일이다.
앞에서는 칭찬을 하고 뒤에서는 별나다고 흉보던 단톡을 보게 된 일, 형제와 끊임없이 비교하시는 일, 나의 성취감에 기뻐하면 형제는 어떡하냐고 앞에서 한숨을 쉬시는 일(옆에 없어도 항상 소환되어 비교하셨다.), 이 일은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이어진 반복된 일이다. 이런 반응을 참 오랫동안 꿋꿋이 잔비처럼 맞았다.
내가 성공하면 안 되고 주목받으면 안 된다는 믿음의 계기가 되었다.
'내 성공을 그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비교하는 형제를 그저 제 속도대로 봐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
'왜 가족은 모두 다 한꺼번에 좋아야 행복이라고 정의할까?'
'그냥 조금씩 기뻐하고 축하하면 되는거 아닌가?'
우리가족만큼 행복의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가족이 있을까?
얼마나 완벽해야 할까?
그 뒤틀림이 참 오래 굳어져 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의 골이 깊어졌을까?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가끔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너무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냉정해졌을까?
대신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엄마의 자리가 된 내가 딸인 나에게 해주고픈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