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혹은 들풀
"누가 봐준다고 저렇게 예쁘게 피어있는 거야~"
내 시선에서 잡초는 뭔가 안쓰러웠다. 좀 더 사랑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다면 분명 화원에 파는 화초처럼 대접?을 받을 텐데 길에서 봤을 때 전혀 차이가 안 보이는 화사함과 자태가 애잔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이름 모르는 야생화, 혹은 들풀로 부르는 요즘이지만 이 글에서는 흔하게 막 자라는 의미로 잡초라는 표현을 써보려고 한다.
이 잡초들은 어쩔 땐 화원에서의 꽃들보다 더 싱그럽고 오랫동안 꽃을 피워내 감탄하곤 했었다.
하천과 강이 이어진 곳에 산책길이 있다.
덕분에 그 하천을 운동삼아 자주 걷게 되는데 그때마다 보이는 잡초에 내 마음을 투영했던 것 같다.
"좀 더 돌봄 받고 크는 금수저가 되었으면 내가 지금쯤 좀 더 빛나지 않았을까?"
내 마음속 숨겨둔 작은 마음이 잡초를 통해 들켜버린 것이다.
잡초는 아무 말이 없이 자기를 드러내는데 나 혼자 감정이입을 하면서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 산골에 귀농을 하고 살고 계신 부모님 집에서 우연히 비슷한 잡초를 발견했다.
역시나 돌무더기 옆, 흙이랑 뿌리가 닿아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는 자리에서 꽃까지 피워내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잡초를 화초로 잘 키우겠다고 야심 차게 데리고 왔다. 우리 집에 병약한 화초들에게 이 야생적 강인함을 배우라는 이상한 마음도 갖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이 웃기는지 엄마는 집 마당에 있는 예쁘게 생긴 잡초들을 여러 종류를 모아주셨다.
이 잡초는 광대나물이라는 야생화였는데 집에 오자마자 꽃을 접고 씨앗을 마구 만들었다.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잡초 말고 다른 녀석들도 결국 우리 집에서 모두 전사했다.
처음에 우리 집은 식물이 잘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가졌다고 생각해 좌절하기도 했다.
이때 배우게 된 것은 야생화는 사람이 키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산과 들에 사는 모든 생물들이 그렇듯 사람 손으로 클 녀석이 아니라는 자각이었다.
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빛으로는 어림없었다. 식물등도 부족했다.
그저 직접적으로 내리는 햇빛으로 광합성하고 가끔 모두 떠내려갈 만큼 쏟아지는 비로 크고 온몸을 휘청이고 눕게 하는 바람으로 자라는 아이였다.
식물은 자기가 자랄 환경을 너무 잘 알고 거기에서 씨앗을 티운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하는 식물은 키를 키워 온몸으로 햇빛을 받는다. 햇빛이 조금 필요한 아이는 큰 나무 밑에서 자라고 물이 필요한 친구는 바위와 냇물 사이에 틈을 비집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만들어준 유산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다.
오로지 자신이 자연과 맞닥뜨려 받는 양분으로 크는 사람들 말이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
"가는 길마다 왜 이렇게 쉽지 않지?"
"저렇게 쉽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나는?"
이런 생각이 자신을 삼킬 때 자신 안에 숨겨진 야생성을 발견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사람손으로 크는 사람이 아니고 좀 더 큰 뜻으로 커야 할 사람임을 발견하자.
물론 내 손으로도 충분히 클 수 있는 수많은 화초들에게는 부지런히 사랑을 나눠보자.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불자로서 글을 읽는 독자 모두 불성으로 가득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