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히 Feb 14. 2017

기획자, AE

그 어정쩡한 직업을 가진 지 9년차

나는 기획자다. 요즘 말로 AE라는 단어도 많이 쓴다. 광고나 홍보, 언론쪽을 전공하지 않았던 내가 기획자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건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건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다.




> 기획자로써의 첫 프로젝트, 그 달콤쌉싸름한 경험

내가 기획자로써 맡았던 첫 프로젝트를 기억한다. 때는 2008년 겨울, 인천에 로봇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가 생길 예정이었고 나는 그 테마파크를 홍보하기 위한 영상제작 기획안을 작성해야 했다. 모든 기획안은 파워포인트로 작성되어야 했다. 파워포인트라곤 대학생때 과제 제출을 위해 몇 번 만지작 거려본 게 전부였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총 동원해서 그럴싸한(내 눈에는) 기획안을 썼더랬다. 현황을 분석하고, 대내외적인 이슈를 살펴보고, 홍보방향은 무엇인지, 어떤 홍보영상을 제작할 것인지, 컨셉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과 더불어 작가도 아니었던 주제에 시나리오까지 썼었다.


글 쓰기를 좋아하고,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것이 파워포인트건 포토샵이건) 만들거나 꾸미길 좋아했던 내가 하기엔 적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첫 기획안을 작성했고,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도맡았으며, 보기 좋게 탈락했다. 23살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탈락의 쓴 경험을 맛보며 기획자라는 직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기획자? 그게 뭐야? 먹는거야?

그 이후에 진행했던 일들은 앞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료수집, 분석, 컨셉도출, 시나리오, 운영방안. 채 20글자도 안되는 항목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 항목이 차지하는 페이지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일이 좋았고, 간간히 들려오는 수주 소식에 기뻐했다.


그렇게 첫 명절을 맞이했다. 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의 취직과 직업에 대해 물었다. 나는 자신있게 '기획자'라고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물음표였다. 눈빛을 보아하니 '그게 뭣에 쓰이는 직업인고' 였다. 기획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낯선 직업이었던가? 기획팀이라는 팀의 존재가 그렇게 어색한 단어였던가?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대체 나의 직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분야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했다. 당시의 내가 했던 일은 '홍보영상 기획' 이었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영상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담당한 분야는 '홍보영상' 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다. 광고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홍보영상?


사실 나도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홍보영상'이라는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분야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 내가 느닷없이 전공과도 무관한 홍보영상을 기획하게 되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각설하고, 나도 현업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홍보영상이 뭔지 몰랐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땠겠는가. 더군다나 영역 자체가 생소한 분야의 기획자라고 하니, 더 남일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기획자는 다만 성장할 뿐이다.

처음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미직지근했다. 명확하게 이해를 못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니 내가 그렇게 설명했던것 같다. 하지만 비단 내 문제만은 아니었다. 기획자라는 직업은 마치 '나 무역회사 다녀'와 그 뉘앙스가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물어보는 모든 이들에게 일일히 내 직업을 설명하는게 너무나도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대답했다. "어, 나 홍보기획해." 물론 이 말도 기획자라는 직업을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홍보영상 뿐만 아니라 광고나 프레젠테이션, 행사, 프로모션, 온라인 등 다양한 분야의 기획을 해야만 했다. '홍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섭다. 온갖것들을 다 우겨넣어도 말이 된다. 그렇다보니 기획자는 이 모든 업무에 대한 기획을 해내야만 했다. 클라이언트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것도 하시나요? 저희 필요한데.' 라고 하는 클라이언트 앞에 그 어떤 사장이 '저희 그런거 못합니다.' 라고 대답할까? 그길로 기획자에게 '이런저런 기획좀 해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련분야 사장님들은 기획자에게 이런 업무지시를 응당 내린다. 나란 기획자는 별 수 없었다. 모르는 분야지만 일단 해야 했다. 찾아보고, 물어보고 수 없이 반복하며 부디 내가 물을 붓는 이 독이 깨진 독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것이 나란 기획자를 성장시키고 있는 단계였다는 것을. 그 순간 '삽질'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피가되고 살이되고 있었음을.




> 나 걍 홍보기획자야.

9년차에 다다른 지금, 아직도 주변에서는 내 직업을 묻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건지 몰라서 설명을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감에 따라 나의 답변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어, 나 지금 광고기획해." 기획자라는 내 직업에 대해 가장 빠르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 이렇게 되묻는다. "너 막 CF 만들어?" 그럼 난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어, 예전에 만든적도 있어. 지금은 광고나 홍보나 이것저것 다 기획해. 기획이라는 직업이 범주가 넓어. 그냥 그런 일이야." 질문한 사람은 다소 벙찐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까지도 이렇게 설명하는 것 외에는 내 직업을 설명할 기력이 없는 것을.


예전에 읽었던 어느 책에서 AE라는 직업이 설명하기 애매모호한 직업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분은 앗싸리 그냥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반대로 먼저 물어보게끔 한다고 했었다. 그것도 나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단어를 내가 만들자니 귀찮다. 나는 그냥 홍보기획자가 편하다. Account Executive 라는 단어는 왠지 내 일과 썩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는 걍 홍보 기획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 직장동료들과의 단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