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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14. 2021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뒀다. 그간의 직장생활 경력에 휴직이나 이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적은 처음 겪는 일이다. 물론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3년차였고, 아이가 없었고, 일은 힘들었고, 스트레스는 쌓였고, 불안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나의 큰 장점 중 하나인 '한 귀로 듣고 흘리기' 스킬이 점점 닳아 없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이상의 스트레스가 심신으로 큰 무리를 안겨주었다. (이 스트레스의 90%는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의 누군가에게서 받았다.) 이겨내자고 하면 또 어찌저찌 이겨냈겠지만, 그 스트레스가 지나간다 한들 앞으로 그런 스트레스가 더이상 없을것이라는 확신이라곤 1도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아니어도, 그 클라이언트가 아니어도, 나는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의 짜증 섞인 피드백을 들어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AE라는 직업이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수반되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다. 광고 대행이라고 진행되는 시기가 되면 클라이언트와 방송사 사이에서 그 모든 피드백과 전달사항을 왔다갔다 하는 그 과정속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에지간해서는 잘 해소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AE라는 직업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기획이 즐거웠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이 행복했으며,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때의 쾌감은 정말 짜릿했다. 그러나 나와 마주한 수 많은 사람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독사같은 존재들이 나를 야금야금 갏아먹었고, 결국 나는 '직장생활'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다. 일이 재미없어서 그만둔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하고싶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권태기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했다. 이게 정말 네가 원하던 일이었냐, 이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일해서 너는 무엇을 얻기에 그 모든걸 감당하려고 하느냐 등등. 


그렇다. 문제는 '나는 무엇을 얻기에' 에 있었다. 그래서 일의 권태기가 매우 위험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얻은 것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마치 밑 빠진 독에 부어지는 물처럼 졸졸 새어나가는 구멍은 수리되지 않았고, 얻는것에 비해 잃는게 많아진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퇴사를 함에 앞서 거창한 것들은 없었다. 그저 때마침 몸이 좋지 않았고, 그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 수술을 동반하는 상황이었기에 그 누구도 나의 퇴사를 만류할 수 없었다. 서면으로 작성한 사직서나 퇴직서 하나 없이, 그 몸으로는 나는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판단 하에 '권고사직'의 형태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구하는 데만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결국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부터 시작된 나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도 된다는 것이.


성공적이다.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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