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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드>

Red↔Black=White

by 미니고래



2016년 6월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 연극 <레드>가 다시 올라왔다. 이 연극은 추상적인 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70)와 가상의 인물인 그의 조수 ‘켄’의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서 마크는 새롭게 고용한 조수 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보이지?”


켄은 이렇게 답한다.

“레드요. 레드가 보여요.”


그리고 마크는 켄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드? 도대체 레드가 뭔데!”


다소 경계가 모호한 ‘레드’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한 울림을 가지고 객석에 퍼진다. 이 연극이 끝나고 나면 ‘레드’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될까?


우선 마크 로스코에게 ‘레드’는 다양함을 내포하는 컬러이다. 그에게 있어 ‘레드’라는 기표 배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작품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것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관객 혹은 독자의 의무인 것이다.


‘피와 심장, 생명의 살아있는 꿈틀거림’ 등을 상징하는 ‘레드’라는 기표는 언제나 ‘죽음과 공포, 심연’ 등을 상징하는 ‘블랙’이라는 기표와 상호보완적이며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마크 로스코에게 있어 이 두 가지 컬러는 사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마크에게 있어 블랙이 레드의 대척점에 존재한다면, 켄에게는 ‘화이트’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살해당한 부모님의 모습이라는 사건이 담겨있는 시간과 공간은 창문 바깥에 쌓인 눈의 ‘화이트’ 컬러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심연의 ‘블랙’ 컬러와 모든 것이 탈색되어버린 창백한 ‘화이트’는 분명한 대조를 보이는 동시에 사실은 동일한 컬러로 관객들에게 해석되기를 무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이 말하는 ‘레드’의 의미는 그저 ‘블랙’과 ‘화이트’의 반대편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처 읽지 못한 페이지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상적인 상징으로 시작하는 이 연극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수많은 기호와 텍스트들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렘브란트와 고흐, 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모차르트와 바흐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프로이드와 니체 등 무대에 쏟아진 기표들은 이윽고 흘러 넘쳐 객석을 채운다.

특히 이 공연에서 관객들을 흠뻑 적시는 것은 바로 니체의 텍스트들이다. 실제로 마크 로스코는 니체의 철학에 깊이 빠져있던 화가이기도 하다. 연극 <레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들을 니체의 텍스트로 은밀하게 안내하는데, 덕분에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니체의 여러 저작들을 조금씩 읽게 되는 것이다.

조수로서 일을 시작하는 켄에게 마크는 “미술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거야!”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中)


문득 젊은 조수 켄이 조명을 밝힌다. 그리고 가상의 벽에 걸려있는 마크의 그림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그런데 그가 유심히 보는 그림들은 바로 관객들이다. 어두운 객석 뒤에 숨어 무대 공간에서 배우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훔쳐보는 행위에 익숙해져있던 관객들의 당혹스러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불을 환히 밝히고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니체의 다음 구절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된다.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中)


결국 ‘블랙’과 ‘화이트’의 반대편에서 ‘레드’는 우리에게 이런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접 고민하고 생각하는, 이른바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야말로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냐하면을 가진 자”(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中)가 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말이다.


- 캐스팅 : 한명구, 박정복

- 이미지출처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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