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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블랙 버드>

세 가지 즐거움, 그리고 한 가지 아쉬움

by 미니고래

2016년 10월 13일부터 연극 <블랙 버드Blackbird>(데이비드 해로우어David Harrower 作)가 ‘DCF대명문화공장’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2005년 영국에서 초연된 <블랙 버드>는 이후 유럽 각지와 미국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관객들과 평론가들에게 호평 받으면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Una>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올 해 9월에 텔류라이드 영화제Telluride Film Festival (in Telluride, Colorado, U.S.)에서 초연되었다.


연극 <블랙 버드>는 50대의 남성 ‘레이Ray Brooks’(조재현 분)와 그녀의 옛 연인인 ‘우나Una Spencer’(채수빈/ 옥자연 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관한 작품이다. 이들은 15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우나는 현재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무대는 어떤 사무실이다. 1970년대 내지는 80년대의 사무실처럼 보인다. 지금의 사무실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든가 복합기, 하다못해 프린터 같은 것들이라도 말이다. 대신 한구석에는 낡은 캐비닛 몇 개가 줄지어 서있다. 사무실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 사무실 저 편으로는 복도를 향한 창문이 있고, 블라인더가 내려져 있다. 사무실 출입문은 닫혀있다. 그리고 양쪽 벽과 테이블 위, 바닥에는 온통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굴러다닌다. 그나마 양쪽 벽으로는 대충 쓰레기들을 쌓아 올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기저기 얼룩처럼 놓여있는 쓰레기들은 낡은 공간을 더욱 바랜 빛으로 채운다.

무대 위에 준비된 이 공간은 레이의 내면과 우나의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레이와 우나가 나누었던 감정과 행위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이들 사이의 관계와 갈등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세 가지 층위가 중첩된 것으로 우리는 <블랙 버드>의 공간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깜깜한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불이 켜진다. 그 안에는 놀라는 모습의 한 중년 남자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가 있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다.


많이 놀랐어요?


그녀의 첫 대사이다. 이는 사무실에 들어온 ‘레이’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암전되었다가 갑자기 밝아진 무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두 인물 때문에 놀랐을 관객들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어쨌든 관객들이 놀라기를 원했던 것 같다.) 제 4의 벽이라고도 부르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갑자기 뚫고 나온 그녀의 대사는 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극이 시작되고 시간이 제법 흐른 상태에서도 관객들은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이인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더군다나 그들 사이의 대화는 파편처럼 흩날린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수수께끼는 극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단서가 주어지지만, 극의 중반부까지 명쾌하게 답을 설명해주는 대신 관객들이 짐작하고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탄탄한 원작, 뛰어난 무대 디자인, 훌륭한 연출, 그러나……


<블랙 버드>는 ‘열두 살 소녀와 중년 남성의 섹스’라는 금기라는 소재를 다룬 서사를 두 명의 인물이 끌어가야 한다. 따라서 특히나 배우들의 역량과 서로의 호흡이 더욱 중요하다. 두 인물의 섬세한 감성이 잘 드러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레이와 우나라는 인물의 내적 동기와 욕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우나(옥자연 분)는 첫 공연 날의 긴장 때문인지 자기 분량을 어떻게든 소화시키는 데 급급하다. 적어도 15년 전으로 돌아가 열두 살 소녀로서 이야기하기 직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우나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어색한 것처럼 보인다. 뭐 공연 첫 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색한 것은 레이(조재현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사 순서를 자꾸 고민하는 눈치다. 일부러 이것이 연극이고 여기가 극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서사극 기법인가? 심지어 우나와 대사가 충돌하고 말을 더듬기까지 한다. 때로는 갑자기 호흡을 멈추고 고민하다가 간신히 말을 이어간다. 그 대사가 원래 그렇게 쥐어짜내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일까? 더군다나 스크린에 더욱 익숙해진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는 종종 객석 먼 곳에 정말 간신히 도달한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이날 공연에서 관객들이 레이와 우나를 만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무대 위에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배우 조재현과 낯선 배우 옥자연이 있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분명하게 서로를 사랑했다고 믿었던 순간에 격정적으로 나누는 레이와 우나의 입맞춤은 없고, 두 배우의 어색한 키스신만 있었던 순간에는 분명히 그랬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블랙 버드>는 ‘열두 살 소녀와 중년 남성의 섹스’라는 금기라는 소재를 다룬 서사를 두 명의 인물이 끌어가는 2인극이라는 점에서 배우들의 기량과 호흡이 중요하다. 타자에게 내비치기 두려워 감춰야만 하는,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그 욕망의 공통점과 차이점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두 인물의 섬세한 감성이 잘 드러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레이와 우나라는 인물의 내적 동기와 은밀한 욕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11월 1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공연의 첫 날이었던 만큼 앞으로 이어질 공연은 보다 높은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희곡과 연출, 무대 디자인을 무색하게 만든 아쉬움은 길게 남을 것만 같다.


사진출처_https://twicopy.org/soohyun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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