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어쩌면 내일의 이야기
2017년 2월 11일부터 대학로예술극장 3층 대극장에서는 연극 <혈우血雨>(한민규 작, 이지수 연출)가, 그리고 지하의 소극장에서는 전날인 10일부터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김승철 작, 연출)이 공연을 시작했다. 두 작품 모두 2월 26일까지 관객들을 맞이했다.
일단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은 중년의 한 남자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을 찾아온 한나절의 시간을 독자 또는 관객에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부인과 함께,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 때문에 이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 낡은 집은 그 남자가 예전에 살던 집이었다. 이윽고 부인은 꽃을 사러 잠시 무대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홀로 남은 그 공간에서 남자의 과거가 하나씩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아마 우리는 이 작품을 극중극 형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중년 남자(이대연, 장용철 분)는 일종의 서술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독자 또는 관객은 그가 보여주는, 서술하는 과거 이야기를 극적 환상의 형식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극단 ‘아르케’의 전작들과 비교해본다면, 드디어 제대로 힘을 빼는 데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주인공의 형 성구(김현중 분)가 ‘욕망’에 대해 애써 설명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은 독자 또는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당부하는 대신, 담담하게 한 남자의 인생을 보여주기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제대로 마련해주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삶의 은유로서의 신발
극의 초반, 폐허가 된 빈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신발에 주목했던 독자 또는 관객이라면 <툇마루가 있는 집>의 서사가 끝나고 난 뒤, 보다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인간의 삶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면, 무대 위에서 교차하는 여러 인물들의 삶의 흔적이 바로 그 신발들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극중 살아있을 때의 성구가 신발을 신고 등장하는 반면, 망령으로 나타날 때의 성구가 맨발로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대가 마당이라는 공간으로 나타나는 점도 독자 또는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연극이 ‘한국의 연극’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얻은 몇 안 되는 결실 중 하나가 바로 ‘마당성’이라고 본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전통을 긍정적으로 계승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요소, 즉 신발과 마당의 결합은 흥미로운 연극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툇마루가 있는 집>에는 꽤나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방에서 나와 무대가 되는 마당에 등장할 때, 각각의 신발을 신고 마당에 나서게 된다. 즉 무대는 삶의 현장이라는 비유 그 자체인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고 모든 세상은 무대(thearum mundi)라는 이와 같은 관념은 극중극이라는 작품의 형식과 결합되어 독자 또는 관객에게 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고 보면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등장인물들의 신발 위치 변화가 꽤나 복잡한 경우도 생겼을 것 같은데,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동선을 짜느라 연출이 많이 고생했을 것도 같다.
지금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극중극이라는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일단 내부극에서 주인공 진구(청년역 송현섭 분, 소년역 김보라 분)의 어머니(이경성 분)가 중년 남자의 아내 역할을 함께 수행한 부분도 흥미로운 극적 요소이다. 내부극에서 어머니는 치매증상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강애심 분)와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가족 구조의 중심에 위치한다. 게다가 내부극의 더 먼 과거 부분에서 비교적 건강한 할머니가 가족 구조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외부극으로 돌아오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치매 증상을 겪고 있으며 같은 배우가 주인공의 아내 역할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련의 순환은 이 연극의 서사를 과거의 단절성으로부터 벗어나 무한히 반복되는 성질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이 연극의 관객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50대 이하의 연령층이다. 그들은 이 연극을 아마 ‘아버지’들의 이야기로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주 어린 관객은 어쩌면 할아버지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50대 이상의 연령층으로, 이 독자 또는 관객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연극을 통해 만나게 될 것이다. 이들은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다고 믿었던 삶을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러한 두 부류의 관객들은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의 무한한 반복성을 통해, 그리고 그 무대와 연극이 사실은 2017년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받게 될 것이다. 과거의 내부극이 어제이고 극중 현재의 외부극이 오늘이라면, 실제 현재에 존재하는 독자 또는 관객들의 ‘내일’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 말이다.
사진 출처 : http://www.sculturein.com/news/3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