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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Nov 06. 2017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영화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영화



 11월 9일, 뉴욕의 가을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국에서는 8월에 선보인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이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우선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배우들이 반갑다. 현실의 아버지인 ‘이든 웹’ 역할은 피어스 브로스넌Pierce Brosnan이 맡았으며, 어머니인 ‘주디스 웹’ 역할은 <섹스 앤 더 시티>로 낯익은 신시아 닉슨Cynthia Nixon이 연기한다. 사실 주인공 ‘토마스 웹’을 연기한 칼럼 터너Callum Turner 역시 2018년 개봉하는 <신비한 동물사전 2>을 통해 내년부터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배우가 될 예정이기도 하다.


 <리빙보이 인 뉴욕>의 서사는 매우 편안하다.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갈등이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심화되어 클라이막스에 이른 후 적절한 반전과 함께 갈등이 해소되는, 이른바 익숙한 플롯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소 한국의 막장드라마스러운 내러티브를 뉴욕 가을의 근사한 이미지들과 함께 즐기는 ‘무난한’ 영화로서 <리빙보이 인 뉴욕>을 소비한다 해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조금 예민한 독자 또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뭔가 거슬리는 뒷맛 때문에 문득 다시 돌이켜보게 될 법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 영화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서사를 조립한 구조로 되어있다. 워낙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맨질맨질하게 접합되어있기 때문에, 그 경계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영화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의 아버지, 상상의 아버지

 전반부는 주인공 토마스 웹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뉴욕New York’의 시공간이다. 그에게는 남몰래 좋아하는 이성친구 ‘미미’(키어지 클레먼스Kiersey Clemons 분)가 있다. 그녀의 모습은 토마스가 겪고 살아본 모든 세계, 즉 뉴욕에서 가장 아름답다. 우리는 아버지인 ‘이든 웹’의 모습 역시 토마스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가였지만 문학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경영하는 이든의 모습은 ‘권위적’이며 ‘속물적’이다. 어머니인 주디스 역시 주인공을 힘들고 귀찮게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전반부를, 마치 뭉크(Edvard Munch)나 샤갈(Marc Chagall)의 회화작품들처럼, ‘토마스 웹’이라는 서술자 개인의 체험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웃으로 이사 온 ‘W.F.’(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 분)와 그의 집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W.F.’의 집은 토마스가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타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이야기들의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거의 비어있는 상태다. 미처 채워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앙상한 공간이다. 마치 아직은 어린,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세계처럼 말이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웃 ‘W.F’는 토마스가 여러 가지 고민을 상담하고 조언을 얻는 ‘늙은 남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것이 토마스 개인의 체험이라는 점과 결합시켜보면, 우리는 이것이 사실은 토마스가 항상 상상했던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낯선 옆집 남성은 주인공이 꿈꾸는 작가의 길을 응원한다. ‘이든’과는 다르게 얼마든지 술을 함께 마시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으며, (아마 마리화나로 보이는) 연초도 함께 피운다. 마치 친구처럼 편안하고, 때로는 조언과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든든한 이미지는 결국 주인공이 ‘상상하는’ 아버지 이미지인 것이다.


 ‘W.F.’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조한나’(케이트 베킨세일Kate Beckinsale 분) 역시 토마스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현실의 아버지 이든과 바람피우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녀가 토마스에게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미지로 체험되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리빙보이 인 뉴욕>의 전반부는 주인공인 ‘토마스 웹’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토마스와 조한나의 육체적 결합이 실은 주인공의 욕망이 빚어낸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표면에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결합하는 장면이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것도, 그것이 토마스의 상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어느 날 이웃집에서 상상적 아버지 W.F.가 사라진다. 그런데 토마스가 그의 빈집에서 발견하는 것이 있다. 테이블 위 ‘타자기’와 ‘텍스트’다. 텍스트의 제목은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기도 한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 즉 ‘뉴욕에서 홀로 살아있는 소년’이다.


 이 장면은 <리빙보이 인 뉴욕>은 이 영화의 그 내용이 소설 속 이야기, 즉 허구라는 점을 표면에 내세우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전반부가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 즉 허구이자 환상(Fantasy)이었다는 영화의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 이후로 인물들의 캐릭터가 재배치되기 시작한다. 상상적 아버지였던 W.F.와 현실의 아버지 이든의 자리는 서로 교환된다. 잔소리나 늘어놓는 귀찮은 존재였던 어머니 주디스는 소중한 ‘우리 엄마’가 되고, 상상적 어머니였던 조한나는 타자의 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하여 <리빙보이 인 뉴욕>의 후반부 서사는 “나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그려지게 된다.


 한국과 같은 정착지역 문화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땅이나 토지(土地), 즉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가족이 모두 모여 살아도, 남북분단 상황에서 ‘실향민’이라는 ‘뿌리를 상실한 주체’가 구성된다. ‘나의 살던 고향’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것도, 낯선 이를 만나면 먼저 ‘고향이 어디세요?’를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같은 이민지역 문화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가문이나 혈통, 즉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통해 구성된다.


 주인공은, 이든 ‘웹’과 그의 부인 주디스 ‘웹’의 아들 토마스 ‘웹’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데 가문의 이름 ‘Webb’은 그물망이나 거미줄을 뜻하는 ‘web’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그리고 토마스에게 억압과 권위와 속물성의 건축물로 그려지는 출판사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web’은 인쇄용 두루마리 종이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참고로 감독의 이름이 마크 웹Marc Webb이다. 그리고 그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는 <리빙보이 인 뉴욕>의 후반부를, 토마스의 ‘아버지 찾기’ 서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 소설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은 현실의 아버지와 환상적 아버지를 뒤섞는 ‘상상과 현실의 환상적 봉합(Fantasic suture)’을 통해, 주인공 토마스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답을 찾는 미국식 성장소설, 마치 영화 같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영화 역시 마치 판타지 소설 같았고 말이다.


사진출처 : http://enews.imbc.com/News/RetrieveNewsInfo/215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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