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줄게
영화 <빛나는>(원제 <光ひかり>)이 2017년 11월 23일 개봉하면서 한국 관객들을 찾아온다. 일본에서는 앞서 5월 17일 선보였던 작품이며, 칸 국제영화제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 제목은 ‘빛’을 의미하는 ‘光’(ひかり)인데, ‘빛나는’이라는 한국 제목은 아마도 원제가 읽을 때 세 음절(히카리)인 것에 대응하도록 번역한 것 같다.
일단 감독이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다. 가와세 나오미河瀨 直美 감독은 <앙: 단팥 인생 이야기>(원제 <あん>, 2015)를 통해 한국의 대중들에게 조금 알려졌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감독은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다. 반면 일본 내에서나 다른 외국, 특히 유럽 등에서는 잘 알려진 감독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자전적이며 사색적인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항상 노인, 그중에서도 할머니 역할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품들이 자전적이라는 것이, 감독의 고향이 ‘나라현奈良縣’인데 작품들의 공간적 배경이 거의 대부분 이곳 ‘나라奈良’이다. <빛나는>의 도시부분 시퀀스들도 마찬가지로 중간에 아주 잠깐 ‘나라시奈良市’의 명칭이 스쳐지나간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사실 아직까지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번 영화 <빛나는>은 일본과 프랑스가 함께 제작한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미사코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영화의 해설자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미사코는 새롭게 맡은 일을 계기로 약시의 사진작가 마사야를 만난다. 미사코는 마사야의 무뚝뚝한 태도에 힘들어하면서도, 그가 과거에 촬영했던 석양(夕陽) 사진에 마음을 뺏기고, 언젠가는 그 장소에 가보기를 원하게 된다. 목숨처럼 소중한 카메라를 앞에 두고도 마사야는 점차 시력을 잃어가며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그의 갈등과 아픔을 바라보며, 미사코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출처: http://hikari-movie.com(공식 홈페이지)
일단 감독의 전작인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도 나왔던 나가세 마사토시永瀬 正敏가 이번에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사진작가 ‘나카모리 마사야中森 雅哉’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진격의 거인>의 ‘히아나’로 익숙한 미사키 아야메水崎 綾女가 영화 해설 자막가인 ‘오자키 미사코尾崎 美佐子’ 역할을 연기한다.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부터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 영화 <빛나는>을 읽어볼 것이다.
영화 속의 영화, 그리고 진실한 무엇
무엇보다도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영화의 구조, 또는 형식이다. <빛나는>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해설 자막제작자인 미사코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사진작가 마사야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미사코나 마사야 등은 영화 안에서 영화를 보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최초의 갈등은 어떤 영화의 해설 내용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화를 외부의 서사 안에 내부의 서사가, 영화 안에 영화가 끼워져 있는 이른바 ‘극중극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속영화는 ‘도키에時江’와 ‘쥬죠重三’ 두 인물의 서사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1인2역 캐릭터들이다. 쥬죠 역할을 맡은 배우 후지 타츠야藤 竜也는 외부서사에서는 그 영화의 감독인 ‘기타모리北森’ 할아버지다. 그리고 도키에 역할을 맡은 배우 칸노 미스즈神野 三鈴는 외부서사에서는 미사코의 직장상사인 ‘토모코智子’를 연기한다.
엔딩크레딧도 분할된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면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극장 관람석에 앉아서, 등장인물들이 극장 관람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중간에 갑자기 관람석에 앉아있는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잠시 나타나고, 다시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런 극중극 구조에 대해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Alenka Zupančič는 “허구-속의-허구란 허구가 그 자체의 내부에서 그 자체의 외부에 직면하는 계기”라고 설명한다. 그 자체의 내부는 ‘영화 속의 영화’이고, 외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영화 속의 영화의 내용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한 무엇’에 대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허구의 허구, 거짓의 거짓은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詩的으로 상상하는 카메라
<빛나는>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머리가 아프거나 예민한 독자 또는 관객은 멀미 증상까지도 겪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사코가 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나, 도시를 걸을 때 카메라의 위치가 미사코의 눈높이에 고정되어버린다. 이렇게 ‘아이레벨eyelevel’에 고정된 카메라가 미사코의 곁에서 그녀를 관찰하거나 또는 미사코의 시점에서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독자 또는 관객의 영화관람 경험에서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다른 특징적인 카메라워크가 하나 더 있다. 카메라가 시도 때도 없이 인물의 손끝이나 발 아래 놓인 사물들에게 밀착하듯 가까이 접근한 채로 훑듯이 흔들린다. 이런 ‘익스트림 클로즈 샷Extreme Close Shot’으로 찍은 흔들리는 이미지들이 프레임을 가득 채울 때, 독자 또는 관객들은 자신이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나 대상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튕겨나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이미지들은 수시로 흔들리거나 너무 근접하거나, 대상을 놓치고 빗나가버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지 않은 이런 카메라워크는, 그것이 인물들이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미사코가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이 ‘시각’일 때, 카메라는 그녀의 눈에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촉각이나 청각으로 세상을 인지할 때, 카메라는 그 감각을 거슬러 올라가 대상에 닿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영화를 보다가 뭔가 이상하거나 심지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보통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화에 대한 감각에 교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그 감각들을 받아들여보기로 하자. 세상에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가는 우리와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시적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
조금 섬세한 독자 또는 관객이라면, 영화에서 반복된 어떤 말들이 귓가에 남게 될 것이다. 영화 <빛나는>에는 “뭐라고 말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과 같은 뉘앙스의 표현들이 계속 나타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크린에 영사기로 투사한 빛 입자들을 독자 또는 관객들은 관람석에 앉아 ‘보는’ 것이 바로 영화의 개념인 것이다. 뭐 아직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영화의 기본적인 이런 정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빛나는>은 ‘미사코’를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를 시도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결국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이미지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다. 그러므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꿔 말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가 된다.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 즉 언어의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잔여’들을 표현하려고 드니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는” 대사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어떤 두 남성 관객들이 “도저히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의 평가가 꽤 정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제목은 그냥 ‘빛’으로 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다. 외국영화들을 한국에 수입할 때, 가끔 도대체 왜 제목을 이렇게 거지같이 번역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빛나는>은 근래 보기 드문 빼어난 수작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적어도 이 영화를 약간의 울렁거림을 참고 보면, 그것이 설렘으로 느낄 수 있는 시적인 독자 또는 관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11613#117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