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에이르디르
#1. 데니즐리 오토가르 옥상 정원- 고래군
데니즐리(Denizli)에서 에이르디르(Eğirdir)로 가는 길은 터키 중남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른다. 어제 파묵칼레보다는 데니즐리에 더 끌렸던 우리는 에이르디르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어놓고는, 남는 시간 동안 오토가르(Otogarı)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 했다. 물론 오토가르-버스터미널-에 있는 여행사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가까운 시간에 있으면서 가격도 싼 버스를 찾느라 헤매고 난 후에 말이다.
우리는 오토가르 건물 옆에서 발견한 슈퍼마켓에서는 스낵과 물도 사고, 제법 싼 가격에 나도 모르게 혹해서 골라버린 2kg 쌀(에이르디르 숙소에서는 조리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결국 안딸리아까지 고스란히 들고 가버린 그 쌀)도 함께 사서 배낭에 담았다. 하지만 버스 시간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대신 그 주변을 원을 그리듯 가볍게 걷다가 오토가르 옥상 정원과 함께 있는 대합실로 돌아와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건물 안 테이블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로 나를 지켜보고, 나는 옥상 정원으로 걸어 나와 세상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문득 하얀 콧수염이 멋진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신기한 건 나는 짧은 영어로,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터키어로 이야기를 하는 데도 이상하게 의미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옥상 정원을 무대로, 서로 다른 말을 상대에게 건넸다.
할아버지: 여행자인가? 어디로 가는 거야?
고래군: 에이르디르? 에히르디르?
할아버지: 아 그래? 내가 거길 좀 알지. ‘이스파르타(Isparta)’에 있어!
고래군: 이스파르타? 이스파르타!
(노인, 두 명 앞을 가로지르는 공사 자재 몇 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할아버지: 그나저나 이거 보여? 이거 지금 공사하는 중이야. 자 이번에는 이쪽으로 와봐. 아까 그 공사 중이던 것 말이야. 원래는 이건데, 저쪽 게 망가져서 다 뜯어내고 새로 다시 만드는 중이야.
고래군: (‘이게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생각을 하며) 아 그렇구나!
할아버지: 여기 아래층으로 따라와! 내가 짜이 한 잔 대접하지!
고래군: 아 그래? 그런데 내가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있어. 한 번 물어볼게.
(고래군. 미니양에게 묻고, 미니양은 꺼려하는 표정을 짓는다. 고래군은 노인에게 돌아가서 손목시계를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한다.)
고래군: 고맙지만, 우리가 탈 버스가 곧 출발한대.
할아버지: 괜찮아! 버스 타러 내려가는 길에 있는 바로 저기야! 내가 살 테니까 같이 가자고!
고래군: 고마워. 하지만 지금 당장 버스를 타러 가야 할 거 같아.
(노인은 어깨를 으쓱한다. 이윽고 둘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 돌아선다. 문득 노인,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2. 할아버지 미안해요 - 미니양
데니즐리에서 에이르디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 고래군은 담배를 피러 다녀온다고 했다. 하지만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고래군이 나간 길을 따라 그를 찾으러 나갔다. 터미널 옥상을 정원처럼 꾸며놓은 그 곳에서 고래군은 어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뭐해?"
"응?"
"버스 시간 다 되어가는데 왜 안 오나해서."
"이 분이 차 한 잔 사주신다고 같이 가자는데?"
"싫어, 난."
"왜?"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버스타러 가자."
"차 한 잔하고 가자."
"그냥 버스타러 가자."
고래군은 할아버지와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뚱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리고는 버스를 탔는데, 현지인과 차를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고래군은 못내 서운한 눈치였다. 나도 새로운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이야기를 하고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 여행지에서 사귄 친구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기사내용이 떠올라서 불안한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터키에서 현지인이 준 음료수를 마시고 정신을 잃고 사고를 당했다는 기사내용... 괜시리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고래군의 손을 잡아끌고 가던 여행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그 할아버지 아주 높은 확률로 선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차를 대접해준다고 말해준 것이었을텐데... 그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안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3. 그곳을 향하는 버스는 행복하구나- 고래군
처음 터키의 버스를 탔던 것이, 이스탄불에서 셀축(Selçuk)까지 가면서였다. 이 동네 고속버스는 그럭저럭 편안했으며, 그리고 매우 친절했다. 자리마다 각각 작은 모니터가 앞에 달려 있었고, 드라마와 음악과 영화 등의 컨텐츠를 즐길 수 있게끔 이어폰도 하나씩 비닐 포장된 채로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에 느낀 점은 뭐랄까? ‘넓은 땅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것도 신경 쓰는 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우리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던, 쓸데없게(?) 잘 생긴 남자가 카트를 끌고 친절하게 스낵과 음료를 서비스하는 것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국이 유달리 불친절한 걸지도 몰라.’
운전기사 아저씨는 거의 규정 속도를 지킨다. 좀 더 빨리 밟아도 좋으련만 하다가도, ‘하긴 도착 시간을 지키는 것도 원래 중요한 거니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처음 해외여행을 갔던 라오스에서 탔던 익스프레스 버스도 크루(crew)가 있었다.
승무원이 카트를 끌고 다니며 나눠준 가벼운 식사와 음료를 잠깐 깨어 함께 먹었던 미니양은 어느새 다시 잠들어있다.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낯설지만,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풍경들. 끊임없이 펼쳐진 평야 너머로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서 구름이 솟아나고, 햇살과 구름이 만든 얼룩을 가려버리는 산맥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여기가 고원 지대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조금씩 눈커풀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최초의 인류가 살던 에덴동산이 이 근처 어디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 풍경?
문득 눈을 떴다. 옆자리의 그녀도 잠이 들어 있다. 나는 바깥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지형도 그렇고, 산들이 생긴 모양도 그렇고, 마치 오그리마Orgrimmar 근처 어딘가의 불모의 땅을 닮아 있다. 아니구나, 그곳이 여기를 닮았구나. 멀리 보이는 높고 거대한 산들은 봉우리가 하얗게 물들어 있고, 하는 별별 생각들을 하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는데 드디어 지평선과 아주 멀리 산맥들만 보이던 평탄한 고원지대 대자연을 벗어나, 드디어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스파르타 터미널Isparta Otogarı에 도착한 것이다.
“오빠, 잘 자더라?”
“내가 깼을 때는 당신이 계속 자고 있던데?”
“내가 눈 뜨고 있을 때는 오빠가 계속 자고 있던데?”
“응 그래.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이스파르타에서 버스 갈아탄다고 아침에 말 했거든? 죽을래? 이 근처에 에이르디르 호수가 있어. 호수 옆 동네 이름도 에이르디르야.”
“에헤라디야?”
나도 모르게 나온 그 한 마디에,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버스를 찾아 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정말 ‘거대한’ 호수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