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파묵칼레
#1. 셀축 기차역- 고래군
셀축에서 우리가 머물렀던 ‘아르테미스 호텔’에는 1층 건물에 둘러싸인 작은 마당이 있는데, 그 마당을 가로질러 식당이 있다. 여름에는 마당에 테이블을 내어놓기도 하는 모양이다.
호텔에서 우리에게 마련해준 아침식사는 제법 풍성했다. 빵과 시리얼, 다양한 잼과 꿀 등의 스프레드가 있었고, 빵과 곁들여 먹을 과일과 채소들도 있었다. 게다가 마실 거리로 우유와 주스, 커피 등도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비수기라 그런지, 4인실도 우리 둘만 썼는데,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도 몇 명 없다. 아마 여름에는 제법 북적거리겠구나 싶다.
확실히 터키에서 먹는 에크멕Ekmek 빵은 맛있다. 한국에서처럼 단맛이나 버터의 고소한 맛은 없지만, 밀이 가지고 있는 담백하고 깊은 맛과 고유한 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짠맛 때문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아이란Ayran도 시나브로 입에 달라붙었나보다.
아직 잠이 묻은 얼굴로 아침 식사를 하던 그녀가, 빵 위에 뭔가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 기차 타고 데니즐리로 갈래요? 보통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열차 여행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면 이렇게 땅 넓은 나라는 철도가 쭉 깔리기 마련 아닌가? 아무래도 버스여행과 기차여행은 느낌도 다르니까. 그런데 데니즐리(Denizli)는 어디지?
“데니즐리? 파묵칼레 가는 거 아니야?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 그 때도 기차 타고 가요 우리?”
“오빠……. 계속 말하지만 나도 여기 처음이라니까? 그건 이제 그만 좀 물어보지? 그리고 파묵칼레 가려면 데니즐리까지 간 다음 갈아타야 한다고 어제 말했지. 기억 안 나? 기차 탈 거에요, 버스 탈 거에요? 오빠가 결정해.”
이를 악문 그녀의 목소리 건너편 창문으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늘게 빗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창을 등지고 앉아있던 그녀에게, 나는 턱으로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비 온다. 기차 타자.”
#2.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고래군
우리는 흠뻑 젖은 채로 셀축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산은 있었지만 워낙에 배낭이 커서 작은 삼단우산으로는 어림도 없는데다, 비옷은 배낭 가장 깊은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치 한국 가을 장맛비 같다.
셀축 기차역은 작은 간이역이었다. 빗줄기를 헤치고 도착한 플랫폼에는 어딘가로 가려는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개중에는 여행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지금-여기의 시간이 일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비 내리는 일상을 우리는 여행한다. 조금 더 이곳에 머물고 싶지만,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난다. 어쩌면 한 공간에 대해 느끼는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면, 그 때부터 그 공간은 일상성을 띠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짐을 둘러메고 비를 맞으며 뛰어다닌 우리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금세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아주 잠시처럼 쉬었더니, 이윽고 열차가 데니즐리에 들어섰다. 그런데 기차역에서 내리니, 이번에는 여기서 다시 버스터미널 그러니까 여기 말로 오토가르Otogar까지 걸어가야 한단다. 다행히 장대처럼 내리던 빗줄기가 이제는 분무기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모스크가 있는 이스탄불은 역사적인 대도시이고 셀축은 조용한 지방도시 같은 느낌이었다면, 데니즐리는 번화한 현대 도시라는 느낌이다. 촘촘하고 나란하게 건물들이 채워진 도시 공간에 넓은 아스팔트 도로, 게다가 꽤나 모던한 느낌의 오토가르 건물 때문이다. 몹쓸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이 느껴진다.
“파묵칼레보다는 이 도시가 더 궁금해진다?”
“오빠도? 나도 그런데….”
“우리 그냥 데니즐리에 있을까? 숙소부터 찾아보자!”
“안 돼요. 우리 파묵칼레에 숙소 예약했잖아.”
“아…….”
일단 우리는 오토가르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돌무쉬Dolmuş가 있기 때문이다. 오토가르 지하층의 공기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로 가득 차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했다.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벌써 멀미할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차 안에서 얼른 이곳을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람을 모두 채우자 돌무쉬가 출발했다. 이윽고 도시를 벗어났지만 차 안의 공기는 여전히 답답했다. 내리는 비 때문일까? 아니면 오토가르 지하의 자욱한 배기가스가 안에 가득 찼기 때문일까? 어쨌든 멀미가 시작될 것 같은 불안함이 아침의 비처럼 나를 다시 한 번 적시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파묵칼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3. 하얀 산 파묵칼레Pamukkale- 고래군
지난 밤 사진으로 보던 파묵칼레는 뭐랄까……. ‘자연이 빚은 걸작’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투명한 햇살 아래 하얀 석회석 욕조에 맑은 물이 고여서 파란 하늘을 담고 있고, 사진 속에서 자연의 신비를 마음껏 즐기는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여자의 미소는 눈부시기만 했다. 사진 속의 파묵칼레는 정말 그러했다.
“오빠, 여기도 숙제니까 오늘 하루만 자고, 내일 곧바로 이동하자.”
“어제 셀축 숙소에서 본 사진은 정말 예뻤는데. 그나저나 여기 정말 사람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름다운 사진 속 그곳, 파묵칼레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금-여기에 투명한 햇살은 없다. 흐린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수영복을 입은 미녀도 없다. 겨울이었으니까. 그리고 거친 겨울바람은 우리를 날려버리고 싶다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든다.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정말 그냥 시골마을에 잘못 온 거 같아.”
“비수기……라서 그런 거 아닐까? 오빠! 우리 숙소 저기 같은데? 우선 짐 풀고 둘러보자.”
흐린 날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하얀 산.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싼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제 바람은 마치 9월 태풍의 가장자리에 들어선 것처럼 불어온다. 춥다. 사람도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우리 잘못 온 것만 같다. 다만 눈으로 직접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여긴 겨울에 올 곳이 아닌 모양이다.
#4. 나머지 숙제는 나중에 해요 우리- 고래군
어쨌든 허무하지 않고 싶었던 우리는, 그 일대를 최대한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낸 다음 결국 허탈함과 함께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지쳐서 건조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오빠, 다음은 사프란볼루Safranbolu 아니면 카파도키야Kapadokya에요. 어디가 낫겠어?”
“거기도 숙제?”
“응. 카파도키야는 그 왜 스타워즈 찍었다는 그 동네. 열기구 타는 거 유명하다던 그 동네. 사프란볼루는, 뭐 아무튼 간에 어디로 할 거야.”
문득 ‘이스탄불에서는 우리 둘 다 촉촉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뭔가 바짝 메마르고 지친 느낌이다. 바다에서 건져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어쨌든 유명하다고 하니까 들러봐야 할 곳의 목록을 ‘숙제’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그 숙제를 마치고 나서 여유롭게 우리 스타일대로 여행하자던 그녀의 말에 이렇게 함께 다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지치고 메말랐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는 신나거나 궁금하거나 할 때의 촉촉한 표정이 아니다. 대신 역시나 메마르고 지친 표정이다. 나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겠지?
잠시 침묵.
그리고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그냥 다른 데 가자!”
불현 듯 외친 나의 목소리에 갑자기 그녀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확실히 우리는 이렇게 다급하게 여러 지점을 찍고 다니는 건 안 맞는다. 기껏 해야 셀축에 파묵칼레만 들렀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피곤해지는 걸 보니 말이다.
기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검색하던 그녀가 문득 내게 말했다.
“에이르디르(Eğirdir)!”
“응? 뭐?”
“오빠 저번에 안탈리아 가보고 싶다 했던 거 기억나요?
“응!”
“여기서 거기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인데, 나 여기 가보고 싶어.”
“그런데 우리 이렇게 막 일정 바꿔도 되나?”
“안 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
“오빠 그럼 여기 가볼까요? 아니면 다른 데?”
“거기 가보자! 나머지 숙제는 다음에 와서 하지 뭐.”
쌀쌀한 겨울비 내리는 파묵칼레의 밤, 우리는 그렇게 원래 계획된 일정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5. 숙제는 재미가 없어 - 미니양
여행을 하다보면 유명하다고 하는 곳들을 들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다녀온 지인들부터 방송, 인터넷 등등 여기저기서 좋다고 하니까 가보지 않으면 꼭 그 곳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때도 있고... 터키로 떠나오기 전 지인들에게서 파묵칼레랑 카파도키아는 꼭 가보라는 얘기를 들었고, 일정도 대충 알려주었다. 너무나도 좋다는 말에 '그럼 한 번 가보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터키 일정을 짜기로 한 것이다. 이스탄불에 도착해 셀축에 들러 파묵칼레로 왔는데... 분명 파묵칼레는 매력적인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고래군도 재미가 없어보이는 눈치였지만, 서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순간, 고래군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누가 내주지도 않은 숙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가 좋다더라 하는 블로그나 여행사이트가 아닌, 순수하게 지도만 보고 터키 곳곳을 둘러보며, 가고 싶은 찾아봤다. 그리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에이르디르라는 곳과 안탈리아라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러가는 학생처럼 우리는 신나게 짐을 싸서 파묵칼레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