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에이르디르
#1. 내 마음도 호수이고 싶소 - 고래군
우리는 이스파르타Isparta에서 갈아탄 버스에서 내려, 이곳 에이르디르Eğirdir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우리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거대한 호수의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에이르디르는 한 마을의 이름인 동시에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이 호수의 이름이기도 하단다. 호수의 곁에서 그 호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작은 마을 에이르디르.
“오빠! 호수도 예쁘고 산도 예쁘다!”
“호수에 파도가 치는데? 수평선도 보여! 저 산꼭대기 하얀 건 눈인가?”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녀가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두 단어로 이 풍경을 근사하게 정의 내렸다. 하긴 그 형용사들 말고는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 봉우리가 하얗게 채색된 거대한 산들이 시야가 사라지는 저 먼 곳까지 호수를 둘러싸듯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거대한 호수는, 마치 바다를 보는 것도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에이르디르 호수는 온순한 바람에 이는 잔잔한 파도를 호숫가에 선 우리 발밑으로 쉼 없이 밀어 보낸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지는 것만 같다. 그래, 평화롭다. 그리고 아름답다.
#2. 인생 숙소 - 고래군
갑작스럽게 새로 만든 일정으로 에이르디르 호수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숙소도 급하게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여행하기에는 한참 비수기였던 덕분에 숙소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더랬다.
호수의 풍경에 마음을 뺏긴 채 시간을 흘려보내던 우리는, 이윽고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갑자기 돌풍과 함께 세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으악! 이거 뭐야!”
“뭐라고? 평화롭다고? 당신 우산은 어디 넣어뒀더라?”
“오빠가 평화롭다며!”
잠시 소나기인가 싶어 어딘지 모를 처마 밑에서 기다려도 봤지만, 빗줄기가 가늘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각자 우산을 꺼내들고 짐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머잖아 그녀의 우산은 뒤집어져 살이 부러졌다. 결국 작은 우산 하나로 간신히 머리가 젖는 것만 피할 수 있었다.
주소와 지도를 들고 그렇게 힘겹게 찾아간 숙소. 온통 젖어버린 우리에게 집주인은 열쇠를 건네준 다음, 바로 옆으로 난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다른 건물로 우리를 이끌었다.
“아침밥은 아까 열쇠를 준 그 건물로 먹으러 와요. 편하게 머물러요.”
“고마워요.”
온통 비에 젖은 몰골로, 완전히 지쳐버린 우리는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와 나는 동시에 감탄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와아’ 하고 말이다.
아, 그런데 주방이 없어서 쪼금, 아주 쪼~금 아쉬웠다.
#3. 내 마음을 울리는 에잔Ezan 소리 - 고래군
이스탄불에서부터 항상 생각하고 느끼는 것 중 하나인데, 내가 지금 ‘터키’라는 낯선 땅에 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원에서 일제히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에잔Ezan’이다. 이슬람에서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노래라고 하는데, 도시의 모든 사원에서 일제히 퍼져 나오면서 마치 세상 전체를 울리는 것만 같다.
아,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언덕 중턱에 위치한 아름답고 (거의) 완벽한 우리 숙소에서 호수 쪽으로 난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골목 건너편 바로 언덕 아래쪽에 아주 작은 사원, 즉 모스크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예배 시간이 되면 그 애잔한 에잔 소리가 아주아주 우렁차게 스피커를 타고 동네 전체를 진동시킨다.
덕분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멜로디를 흉내 내며 내 멋대로 가사를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설거지를 하면서라든가, 혹은 집 청소를 하면서라든가 말이다. 그래서인가? 눈을 감고 에이르디르Eğirdir의 풍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문득 어디선가 에잔Ezan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4. 조용한 2015년 새해맞이 - 미니양
에이르디르는 예정에 없던 여행지였지만, 에이르디르에서의 시간은 참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난생 처음 묵어보는 멋진 숙소도, 아침마다 바로바로 난로에 구워주는 빵이 포함된 호사스러운 조식도, 통유리 카페너머 바다처럼 보였던 큰 호수도, 작지만 있을 것 다 있었던 도시의 곳곳의 모습들까지 우리에게 에이르디르는 서프라이즈 선물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2014년 크리스마스즈음 여행을 시작해, 2015년을 에이르디르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해외에서는 다들 카운트다운을 다함께 외치며, 떠들썩하게 보내지만 에이르디르는 그런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끼리 나름 새해를 특별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시장에서 구워주는 무지개 송어에, 동네 레스토랑에서 양고기 요리도 포장하고, 곁들일 술에, 빵집에서 맛있는 에크맥까지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둘이 잘 차려진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 잔하고 그렇게 즐겁게 2014년을 보내기로 했다.
"오빠! 우리 진짜 맛있는거 많이 샀다, 그치?"
"응. 이 무지개송어 엄청 맛있어."
"양고기도 엄청 맛있는데?"
"역시 빵은 에크맥이야."
"다 맛있어. 좋다. 흐흐흐"
새로 맞이하는 새해에는 더 잘 지내보자, 뭐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결국 혼자 멀뚱멀뚱 새해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왜냐면 고래군이 술을 마시고 일찍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