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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an 01. 2019

디지털 노마드로 산다는 것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산타 클라라의 코펜하겐 커피랩 - 고래군


 이른 아침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벨 진동소리에 일찌감치 잠을 깬 그녀가, 내가 눈을 뜨자마자 투덜거린다.


“나 작업할 거 많을 거 같은데…….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날씨 좋다던데, 그래도 집에 그냥 있어야겠지?”

“이따 저녁에 하면 안 돼?”

“시간이 조금 있기는 한데, 그래도 미리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괜히 또 잘 생각 안 나고 그래서 시간에 쫓기고 하는 거 싫단 말이야.”

“코펜하겐 가서 하면 되겠네. 어제인가 그제인가 당신이 그거 여기에도 생겼다며.”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동굴 속에서 겨울잠 자듯 집에만 틀어박혀 있기에는, 아무래도 화창한 날이 꽤나 아쉬웠던 모양이다.


 작년에 리스본에 머물 때 건너편 언덕에 있는 알투 지역에 있는 한 카페에 갔다가 그 분위기와 커피에 반하게 됐던 카페가 있다. ‘코펜하겐 커피 랩Copenhagen Coffee Lab & Bakery’이라는 이름의 그 카페는 꽤 괜찮은 커피, 직접 구운 다양한 빵들과 함께 북유럽 스타일의 깔끔한 인테리어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덕분에 그 때 우리는, 알파마에서는 조금 멀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하루 종일 작업할 일이 있으면 그곳에 가야겠다며 다음을 기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며칠 전 침대에 누워서 구글맵을 들여다보며 놀던 그녀가 문득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오빠! 코펜하겐이 알파마에도 생겼대! 그것도 두 군데나! 아니 알칸타라에도 하나 생겼네?”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니 하나는 알파마 지점이라는 이름을 달고 골목길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와 내가 잘 아는 곳에 있단다. 바로 산타 클라라 지점이다.


 알파마Alfama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인 포라의 성 빈센테 성당Igreja de São Vicente de Fora의 측면에 난 길을 따라가면, 성당 뒤편으로 산타 클라라Santa Clara라는 작지만 근사한 동네가 나온다. 한가운데에는 햇살 맑은 날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바라볼 수 있는 테주 강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 보토 마차도 공원Jardim Botto Machado이 있다. 그 남쪽으로는 엔리케 왕자와 바스코 다 가마, 그리고 에우제비우가 잠들어 있다고 하는 만신전Panteão Nacional이 웅장한 덩치를 자랑하며 서 있다.


 그녀의 말은 주말이 되면 도둑시장이라고도 불리는 벼룩시장이 들어서는 이곳에 그 카페가 분점을 냈다는 것이다. 흥이 오른 채로 이것저것 찾아본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지난 번 우연히 우리가 찾아 들어갔던 그 곳이 아마도 두 번째 지점이고, 본점은 코펜하겐에 있단다. 지금은 리스본과 독일 몇 군데에도 지점이 있는데, 덴마크에는 본점만 있고 말이다.


 화창한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리스본에서, 우리는 각각 노트북을 챙겨 들고 산타 클라라를 향해 길을 나섰다.




#2. 디지털 노마드? - 미니양


 첫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를 할 때에는 무급휴직으로 왔었기 때문에 리스본에서 따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왔기 때문에 일을 해야만 여행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으니까 일이 들어오면 거절하기가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일은 끊이지 않고 할 만큼 들어왔고 내가 여행 전 바라던 디지털 노마드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코펜하겐 카페가 나왔다. 햇살이 눈부신 좋은 날씨라 야외에서 작업하고 싶었지만 화면의 이미지가 중요한 작업의 특성상 안정적인 빛이 있는 실내에서 작업하기로 했다. 코펜하겐 카페는 현지인보다는 외국인이 많았고, 대부분 우리처럼 노트북을 들고 온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꽤 많아서 자리도 겨우 잡을 수 있었는데, 테이블이 작아서 노트북 두 대를 간신히 놓고 작업을 해야 했다. 그래도 모처럼 나왔으니 새로운 곳에서 작업해보리라 마음을 먹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작업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불편하게 일을 할거면 차라리 집에서 하는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집에 있는 테이블이 좁아 밖으로 나왔는데, 카페 테이블도 좁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거다. 시켰던 커피를 비우고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슬금슬금 카페를 나왔다. 화창한 리스본의 날씨는 나에게 '일하지 말고 놀러 가.' 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일을 해야만 했던 난 유혹을 뿌리치고 얌전히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편하게 작업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처음엔 일상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이루어지니 이젠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3. 코인세탁기 처음 써 봐요 - 고래군


 서쪽 하늘 끝으로 태양이 저물어가는 시각이 되면,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집 앞 전망대로 향한다. 어제는 다섯 시 사십육 분. 오늘은 다섯 시 사십삼 분.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일몰 시각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하루가 지날수록 낮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날들이 조금씩 닳아간다는 사실까지도 동시에 느껴버리고야 말게 된다.


 함께 석양에 물든 리스본을 잠시 바라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졌다고는 하지만 캄캄해지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은 더 남아 있다. 저녁식사를 하기는 약간 이른 시각. 그녀가 내게 제안을 했다.


“오빠, 우리 빨래 돌리러 가자.”


 다행히 겨울에 접어든 계절이라 딱히 땀을 많이 흘리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세탁물이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간단한 것들은 씻을 때 손빨래해서 널어놓으면, 다음날이면 마른다. 그래도 바지라든가 두꺼운 셔츠처럼 손세탁하기는 버거운 것들이 이래저래 쌓여가기 마련이다.


“우리 동전 넉넉히 있어?”

“충분히 있어요.”

“밖에 널어놓으면 밤이슬 맞거나 얼거나 하지 않을까?”

“저번에 지나가면서 보니까 건조기까지 있던 것 같더라.”

“아니, 내가 그 말 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건조기 쓰자고 우리.”

“오빠 신났네.”


 세탁물들을 챙겨든 우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평소 호기심에 기웃거리던 동네 코인세탁소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이라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지만 뭔가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잔뜩 안고 세탁소 안으로 들어섰다. 으음…… 그런데 빈 세탁기가 없다. 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세탁소 안에는 입구 건너편 긴 벽에 드럼세탁기들이 줄지어 붙어있고, 입구 쪽 짧은 벽을 따라 커다란 건조기가 붙어있는 구조였다. 몇 개 있는 의자에는 서너 명이 이미 세탁기를 돌리고 있거나 혹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시도는 일단 실패.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났더니 날이 저물어버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정리를 한 뒤에, 우리는 다시 세탁소에 갔다. 다행히 세탁기는 두 개만 돌아가고 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과 서로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눈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것도 어느새 꽤나 익숙해졌다. 이러다 서울 가면 다시 사람들이 눈도 안 마주치고 마주치더라도 인사를 잘 안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돌아가기 싫어진다. 아무래도 마음을 따뜻해지게 만드는, 이 가벼운 인사들을 나는 좋아하게 된 모양이다.


 세탁기 하나에 우리 세탁물들을 몽땅 밀어 넣었다. 혹시나 다 안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사실인데, 다행히 한꺼번에 들어간다. 더욱 다행인 것은 매뉴얼에는 영어로 적힌 안내문도 함께 적혀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순서대로 동전을 넣고 버튼을 몇 개 누르고 했더니, 우리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일단은 성공이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그녀의 평소 표현을 빌리자면, 늘씬한 언니 한 명이 세탁기에서 빨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양이 제법 많은 것을 보니, 아마도 밀린 세탁물을 잔뜩 들고 온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세탁기를 집에 들여놓느니 이렇게 코인세탁소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작은 공간에서 거주한다면 여유 공간이 더 확보할 수 있을 테고, 어쩌면 비용면에서도 덜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건조기에 세탁물들을 잔뜩 밀어 넣는다. 심지어 건조기 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하려나보다. 나는 ‘이따가 우리도 해야 하니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봐둬야지’ 하는 마음에 그 모습을 어깨 너머로 흘깃거리며 훔쳐본다.


 세탁소에는 와이파이도 마련되어 있다. 덕분에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는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 놀기도 한다. 세탁시간만도 사십 분 가까이 걸리느라, 몇 가지 짐을 다시 갖다 놓으러 중간에 나 혼자 잠시 집에 다녀오기도 했다.


 건조기로 빨래를 옮기는 것은 그녀가 혼자 다 했다. 굳이 두 명이 붙어봤자 오히려 번거롭다며 나를 앉아있게 한 것이다. 늘씬한 언니가 건조기에서 자기 세탁물들을 꺼내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들고 온 커다란 이케아 비닐가방에 옷들을 하나씩 개어넣기 시작했다. 저렇게 들고 가서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양이구나.


 두 번을 돌려서야 건조가 끝난 우리 세탁물들도 대강 개어서 넣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동네 세탁소에서 빨래하고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노라니, 마치 정말로 이 동네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밤하늘 위로 달이 하얗게 빛난다.




#TIP!

- Copenhagen Coffee Lab & Bakery - Santa Clara 

  주소 : Campo de Santa Clara 136, 1100-474 Lisboa, 포르투갈

  메뉴 : 커피류, 디저트, 식사 가능 (가격은 위의 메뉴판 참고)


- TANQMATIC Laundry Self-service (코인 세탁방)

  주소 : Rua da Senhora do Monte 5A, 1170-196 Lisboa, 포르투갈

  빨래 (가장 작은 세탁기 기준) 4유로

  건조기 1회 2유로 (추가시 1회 0.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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