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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Dec 17. 2018

굴벤키안, 카페, 그리고 축구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걸어서 굴벤키안으로 - 고래군


 오늘은 11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다. 그리고 여기는 리스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리스본의 일요일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뭐 이와 같은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문 앞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온 몸을 구겨 넣고는 문에 난 창문 열린 틈으로 흐린 하늘을 훔쳐본다. 머리 위 선반에 놓인 라디오를 켜보고 싶지만, 지지직 투투툭 하는 노이즈 때문에라도 틀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새벽부터 잠에서 깨었다가 어렵게 다시 잠들어 있다. 이른 아침에 내리던 빗소리는, 해가 떠올라 그라싸 수녀원 성당Igreja e Convento da Graça 건물의 하얀 벽에 닿는 시각이 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즈음 그녀 역시 잠에서 깨었다.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굴벤키안 박물관Museu Calouste Gulbenkian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가, 무료 관람은 오후 두 시부터라는 사실을 까먹었음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리스본 시내를 걷는 우리를 향해 거센 바람과 함께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박물관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짊어지고 갔던 백팩을 지하 1층에 맡겼다. 한국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럽의 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은 전시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방과 짐을 반드시 그들에게 맡기도록 한다. 관람객들의 편의와 함께 전시 작품들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지난 주 일요일에는 로댕을 중심으로 당시 파리의 조각 예술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포즈와 변주들- 로댕 시기 파리의 조각Pose e Variações- Escultura em Paris no tempo de Rodin> 전시가 중심이었다면, 오늘은 근대미술관을 그녀와 함께 둘러보기로 한 날이다. 굴벤키안 박물관의 드넓은 부지의 남쪽에 위치한 근대미술관은 영국의 건축가 레슬리 마틴 Sir Leslie Martin의 설계로 1983년 지어진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전시는 작년에 왔을 때 있던 작품들과 새롭게 설치된 작품들이 섞여 있었다.






#2. 교통카드 실종 - 고래군


 우리는 각자 전시를 본 후에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모두 둘러보는 데 대략 세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커다랗게 한쪽 벽면을 통째로 사용하는 유리창 밖으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음에 걸린다. 버스를 타고 간다 해도 726번 버스는, 아니 이 동네 버스들은 배차 간격이 결코 짧지는 않기도 하고 말이다.


 백팩에서 우산을 꺼냈다. 혹시나 비가 올지도 몰라 하는 마음에 나올 때 하나 챙겨오기를 잘 했다. 아침에 봤던 일기예보는 흐리기만 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와 함께 꼭 붙어 우산을 함께 쓰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향한다. 세찬 비 때문에 생긴 물웅덩이들을 조심하며 걷느라 우리는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행여 신발이 젖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저 지금 내딛은 걸음과 다음에 내딛게 될 걸음에만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전광판이 우리에게 버스가 40분은 기다려야 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한다. 우리 바로 앞의 도로에 물웅덩이가 꽤나 깊고 크게 생겨 있다. 덕분에 차들이 우리에게 물벼락을 뿌리며 지나친다. 나는 접었던 우산을 다시 펴고는 그녀와 나를 향해 유령처럼 엄습하는 그 파도들을 막는다. 서너 번에 한 번은 물을 모두 막지 못하는 바람에 흙탕물에 옷과 신발이 젖기 시작한다. 불현 듯 그녀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작년에 축구 보고는 726번 버스 사라졌던 거 생각난다.”

“외계인 납치?”

“응응. 전 정거장에 있다고 그랬다가 갑자기 전광판에서 사라졌잖아. 그것도 한밤중에. 그 때 생각하면 삼사십 분 기다리는 것 정도야 뭐. 설마 이번에도 실종되는 건 아니겠지?”

“…….”

“왜요왜요. 왜 갑자기 표정이 굳어.”

“오빠…… 나 또 사고 쳤어.”

“뭐 재핑카드 실종되기라도 했어?”

“…… 오빠……, 미안.”


 결국 우리는 우산을 펴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지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한 블록 정도 걷고 있노라니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깜빡 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그녀는 계속 미안해하지만, 사실 나는 집에 걸어가는 이 길이 싫지만은 않다.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집에 가는 길에 장도 봐야 했고, 뭐 여차하면 택시라도 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걷다 보니 사람들이 제법 들어찬 파스텔라리아 카페가 있다. 높게 걸린 티브이에서는 축구 경기 중계가 한창이다. 스포르팅 CP 경기다. 문득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혼자 않아 빵과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펼쳐놓고는 축구에 빠져있는 할아버지, 여럿이 함께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 마침 주문하느라 이것저것 고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대체로 지중해 주변의 남유럽에서는 ‘카페’라고 하면 설탕과 티스푼이 받침에 함께 담긴 에스프레소가 나온다.


 그녀와 앉아 축구 경기를 본다. 스포르팅 CP는 포르투갈 축구리그에서 항상 우승을 다투는 명문 축구팀이 속해 있는 리스본의 종합 체육 클럽의 이름이다. 축구 외에도 배구와 풋살 등의 스포츠 팀도 함께 소속되어 있다. 팀의 이름 자체가 ‘포르투갈의 스포츠 클럽Sporting Clube de Portugal’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최근 클럽 회장의 갑질&삽질로 주축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면서 전력이 크게 감소하면서 팬들이 많이 실망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팬들은 팀을 사랑하는 모양인지 진지한 표정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경기를 본다. 문득 그녀와 내가 이곳 리스본에 살게 된다면, 나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있는 주말에는 축구장이 아니면 이렇게 카페에 앉아 경기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경기를 모두 보고 싶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는 이방인이다. 더 늦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3. 재핑카드가 없어서 다행이야 - 미니양


 전시를 꼼꼼하게 보고 나오는 길, 오늘은 집에 갈 때 꼭 버스를 타기로 했었다. 왜냐면 어제 코스타노바를 데려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걸음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2만보는 족히 넘게 걸어서 사실 그냥 집에서 쉬고 싶기도 했지만 일요일 오후에는 왠지 굴벤키안에 가야할 것만 같았기에 설렁설렁 길을 나섰던 것이었다.


 726번 버스를 40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집에 갈땐 버스를 타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바보같이 재핑카드를 집에 놓고 왔다. 올 때는 걸어왔으니까 재핑카드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고, 사실 당연히 가방 안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고래군이 농담삼아 '버스가 왔는데 재핑카드가 없으면 웃기겠다.'라고 했는데... 정말 재핑카드가 없었다. 그 순간 등줄기에 땀이... 현금을 내고서라도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는데 싫단다. 리스본은 현금으로 버스를 타는 것과 재핑카드로 타는 요금 차이가 꽤 많이 나기 때문이다. (대략 1유로 가까이를 더 내야 한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강제 걷기의 시작.


 비도 오고 다리는 아프고 고래군에게는 미안하고... 그렇게 걷다가 비바람도 피할 겸 카페에 가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딱 봐도 동네사람들만 가득한 그 카페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으로 향해있었다. 바로 축구경기가 나오는 티비 화면. 난 축구 대신 축구를 보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 혹은 맥주 한 잔, 그리고 간단한 간식을 놓고  일요일 저녁 카페에서 한가롭게 보내고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국이었으면 새로 시작될 월요일을 준비하느라 우울해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축구보다도 그 공간을 감싸고 있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재핑카드가 없어 주어서 느낄 수 있었던 일요일 저녁의 따뜻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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