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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an 22. 2019

에보라Évora, 알렝떼주의 아름다운 사람들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갑자기 에보라- 고래군


 잠들어 있다가 문득 눈이 떠졌다. 시각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다섯 시에 거의 닿아가고 있다. 이윽고 그녀의 전화기가 거칠게 진동하며 벨소리를 울린다. 또 한국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잠시 통화를 마치고 그녀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우리는 조금 더 누워있기로 한다.


 알파마Alfama 언덕 꼭대기의 그라싸Graça 동네에 있는 이 집은, 현관문에 달린 작은 여닫이 창문 두 개가 바깥의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덕분에 해가 떠도 창틈으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오는 약간의 빛은 집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은, 그래 마치 암벽을 파고 들어간 작은 동굴처럼 생겼다. 동굴 입구에 달린 문을 꼭 닫으면 바깥세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오빠 나 배고파.”

“좀 더 안 자도 괜찮겠어?”

“몰라 잠 다 깼어. 배고파. 나 밥 먹을래.”


 이리 하여 모처럼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슈퍼에서 사둔 식빵을 굽는다. 냉장고에서 샐러드 채소를 꺼내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올린다. 우유와 치즈도 꺼냈다. 다 구워진 빵을 담을 접시에 각각 치즈를 한 조각씩 올리고, 그녀 자리에는 오렌지 주스도 한 컵 올렸다. 그리고 작은 보올bowl에 시리얼을 담아 각각 하나씩 둔다. 빵이 다 구워지면 샐러드 위에 올리브오일을 두어 바퀴 돌려 뿌리고 발사믹 식초도 넉넉하게 뿌려준다. 이제 시리얼 위에 우유를 붓고, ‘잘 먹겠습니다’ 하는 식사 인사와 함께 어제와 비슷한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우리 샐러드 이제 다 먹었더라. 이따 사야 해요. 오빠.”

“응?”

“일찍 일어난 김에 근교 다녀오자. 내일도 날씨 맑다고 해서 내일 갈까 물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오늘 가자.”

“오늘은 이것저것 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나 답답해. 어차피 내일 해도 돼. 아무튼 가자. 어디 갈까?”

“으음…… 에보라?”


 그래서 우리는 설거지를 마치고 서둘러 준비를 마친 다음, 조금은 갑작스럽지만 꽤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서게 되었다.






#2. 에보라는 어디?- 고래군


 에보라Évora는 리스본에서 동쪽으로 대략 130㎞ 정도 떨어져 있는, 일 년 내내 온화한 알렝떼주Alentejo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종종 그냥 Evora라고도 표기되며, 포르투갈 사람들은 ‘에보라’와 ‘에부러’의 중간 정도로 발음하는 듯하다. 


 도시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포르투갈뿐 아니라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뾰족한 나뭇잎에 빨간 열매가 달린 주목朱木이라는 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옛 켈트어 이름이 ebora/ebura라고 한다. 약 5천여 년 전쯤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켈트족 사람들 중 일부가 알렝떼주 지역에 정착했는데, 도시의 명칭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참고로 옛 켈트어 ebora/ebura는, 잉글랜드 쪽에서는 York라는 명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리스본에서 에보라에 다녀오기 위해서는 기차보다는 버스가 낫다고 한다. 기차는 오리엔테 역에서 하루 네 번, 그것도 출퇴근 시간에만 두 번씩 있다고 하니 말이다. 대신 레데 익스프레스Rede Expressos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면, 차편도 삼십 분 내지 한 시간 간격으로 자주 있는 데다가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레데 익스프레스가 운영하는 버스터미널은 세테 히우스Sete Rios 역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근교 여행이라서 버스 티켓을 미리 사지는 못했다. 뭐 어때. 자주 있다고 하니, 가서 제일 빠른 버스 잡아타면 되겠지 뭐.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편도 티켓이 11.90유로였던 것 같은데, 현장 구매를 하니까 12유로가 넘는다. 이거 혹시 현장구매가 조금 더 비싼 걸까?


 우리는 버스에 타자마자 금세 잠들어버렸다.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출발한지 한 시간 정도 흐른 뒤였다. 하늘이 무척이나 파랗다. 오늘은 뭉게뭉게 하얀 구름도 꽤 많이 보인다.


 다른 지중해 인근 지역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유독 이베리아 반도의 맑은 날 하늘이 더욱 눈부신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대서양에서 곧바로 불어오는 맑은 공기 때문 아닐까? 어쨌든 덕분에 맑은 날에도 어딘지 모르게 희뿌연 서울의 하늘과 자꾸 비교를 하게 된다. 다시 돌아가면 이런 하늘은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곳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리 크지 않은 에보라 버스터미널에 내려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자 ‘나도 여기 처음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를 바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도를 보고 방향을 정해 걷자, 이윽고 오래된 성벽이 나온다. 저 성벽 너머가 시내이다.







#3. 지도에도 없어 - 미니양

 

 사실 에보라에 꼭 가야겠다는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글맵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찾은 곳일 뿐이었다. 리스본에서도 가깝고 일에 치여 휴식이 필요했던 터라 한 번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잠깐의 버스여행 끝에 도착한 에보라는 옛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무작정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리스본 알파마와 같은 골목들이 쭉 이어진다. 학교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에 에보라 디자인 대학이라는 간판도 보였다.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나도 여기서 공부하면 포르투갈만의 색채를 가진 디자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대학을 지나 골목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니, 딱 봐도 유명할 것 같은 신전이 나오고 전망이 탁 트인 곳도 만날 수 있었다. 미술관도 있어 평소 같았으면 들어가보려고 했겠지만, 오늘은 날씨를 봐서나 내 답답한 마음상태로 보아 야외를 걷는 것이 더 좋았다. 



"오빠, 우리 커피 한 잔 마실까?"

"그래!"


 이미 구시가지 자판기에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마셨지만 좋은 날씨에 야외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걷다보니 관광지를 벗어나 에보라 사람들이 생활하는 동네가 나왔다. '이 곳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생각을 하며 조용히 걷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식당을 발견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거지? 여긴 대체 무슨 식당이지? 유명한 식당인건가?' 지도를 보는데!! 이 식당, 지도에 안 나온다.


"오빠! 여기 식당 사람 엄청 많아서 찾아봤는데 지도에 없어!"

"그래?"

"응. 우리 그냥 여기서 점심 먹을래?"

"그러고 싶어?"

"사람 많으니까 맛있을 것 같고 재미있을 것도 같은데... 오빠는 싫어? 어떻게 하고 싶어?"

"그럴까?"

"오빠 안내키면 그냥 말자."

"안내키는 건 아닌데..."

"그럼 가지 말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니, 고래군이 딱히 땡기지가 않나보다. (고래군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표현이 명확하지 않은 편이라 반응을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아쉽지만 그냥 돌아서기로 하고 다시 골목을 걷기 시작했는데 난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오빠 배가 안 고파? 나 저기 가보고 싶은데..."

"그래? 그럼 가 보자."

"가도 되겠어?"

"응. 가요."


 난 신난 발걸음으로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는 1,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린 1층 바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는 바깔라우를 비롯한 몇가지가 있었는데 바에서 보면서 고를 수가 있었다. 현지인 식당이라 당연히 영어메뉴판은 없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며 주인아저씨가 영어로 메뉴를 설명해주셨다. 우리가 고른 것은 치킨과 쌀로 만들어진 포르투갈 전통음식(나중에 알고보니 Frango à Brás라는 요리였다), 그리고 식사에 빠질 수 없는 맥주 한 병씩을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음식이 나오고 볶음밥처럼 생긴 음식이 접시에 담겨나왔다. 쌀도 있고, 치킨도 있고, 심지어 감자튀김도 섞여있다. 밥에 감튀가 섞여있다니... 처음에 신기했는데 먹어보니 우리 입맛에도 아주 잘 맞았다. 역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가게에 점점 사람들이 많아진다. 식당에 앉아서 먹는 사람들도 있고, 포장해서 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손님들이 주인아저씨와 모두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저씨가 메뉴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보니, 오늘은 메뉴가 뭐냐 물어보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단골들이 많이 찾는 식당 같았다. 식당에 들어온 사람들의 신기한 시선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들의 생활 속에 녹아든 느낌이 들었다.


 뿌듯하게 식사를 마치고 고래군이 계산을 하러 주인아저씨에게 갔더니 아저씨가 오브리가두(포르투갈어로 고맙습니다.)가 한국말로 뭐냐고 물었단다. 그래서 고래군이 '고맙습니다'라고 알려주니 아저씨가 잔돈을 건네주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주더란다. 유쾌한 주인아저씨와 단골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에보라의 따뜻함을 느꼈던 점심시간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오늘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처음보는 동양인들이 우리 음식을 먹고 있더라' 하는 식의 대화주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문득 다음엔 에보라에서 한 달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오늘이었다.


 






# 에보라 근교여행 Tip: Lisboa to Evora


+ Train

Departures from Lisbon’s Oriente Station:

•Monday - Friday: 7:02, 9:02 and then 17:02, 19:02 

•Saturday & Sunday : 9:52 and then 17:02, 19:02

Departures from Evora Train Station

•Monday – Friday: 7:06, 9:06 and then 16:57, 19:06 

•Saturday & Sunday: 9:06 and then 16:57, 19:06

Please note: Train times were checked in July 2018, please check the CP website (or train station) for any seasonal alterations: 

https://www.cp.pt/StaticFiles/timetables/lisbon-evora-beja-trains.pdf


+ Bus

 https://www.rede-expressos.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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