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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Feb 27. 2019

오리엔떼, 산책의 소중함에 대하여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다시, 햇살에 이끌려 바깥세상으로- 고래군


 원래 어젯밤 잠들기 전 우리가 세웠던 오늘의 계획은 그저 휴식이었다. 에보라 Évora에 갔다가 리스본에 돌아와서 그라 싸 Graça 동네에 도착한 시점이 되었을 때, ‘내일은 좀 쉬자’는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눈부신 햇살에 등 떠밀려 우리도 모르게 꽤 많은 걸음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다. 어쩌면 길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어딘가를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을 떴다. 아침이고, 아직 그녀는 잠들어 있다.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창문 주변 가느다란 틈으로 간신히 빛 입자들이 스며들어와 어두운 실내를 아스라이 밝힌다. 마치 테두리가 빛으로 된 까만색 창문 같다.


 한쪽 창문을 열고 바깥세상을 몰래 내다본다. 밤새 고여 있던 집안 공기와 다른, 바다 쪽에서 흘러오는 싱그러운 바람에 햇살 냄새가 섞여 있다. 동쪽 방향을 향해 펄럭거리는 상조르제 성 Castelo de S. Jorge에 매달린 두 개의 깃발 뒤로 하얀 구름들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파란 하늘에 햇살을 쏟아내는 눈부신 태양이 떠 있다. 바깥이 밝아 살짝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햇살이 강하다.


 그러고 보니 일기예보에서 오늘까지 맑고, 내일부터는 한동안 흐릴 거라고 그녀가 전해주었던 것도 같다. 안 되겠다. 그녀가 일어나면 밥 챙겨 먹고 바깥나들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얼마 동안 문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창문 사이로 하늘을 훔쳐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잠에서 깨어 침실에서 나온다. 나는 그녀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밥 먹고 우리 나가자. 오빠도 지금 그 말하려 했지?”

“……. 내가 할 말 어떻게 알았어?”

“그나저나 어디 가? 또 근교 다녀오기에는 좀 힘들지 않아?”

“우리 오리엔떼 가서 산책하고 오자.”


 이렇게 싱그러운 날 강을 따라 걷고 싶다. 꼬메르시우 쪽에는 저번에 다녀왔으니, 오늘은 오리엔떼 동네에 가고 싶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그녀에게 나는 알기 쉬운 사람인가 보다.






#2. 산책이란, 어쩌면 지금 여기에 그저 ‘있음’을 느끼는 것- 고래군


 기분 좋은 햇살을 피부로 느끼며, 그녀와 함께 알파마 Alfama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산타 아폴로니아 역 Estação de Santa Apolónia에서 기차를 타고 오리엔떼 역 Estação do Oriente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따로 티켓을 끊지 않아도 재핑 카드로 갈 수 있으며, 아마도 먼 곳까지 가는 비싼 기차만 아니면 아무 열차나 타면 되는 것 같단다. 그런데 산타 아폴로니아 역에 들어서자, 갑자기 그녀가 나를 안내데스크에 있던 아저씨에게 보냈다. 확실하게 알아보고 타자는 것이었다. 나요? 내가 가서 물어보라고요?


 떠듬떠듬 물어보니, 시원한 미소와 함께 8번 플랫폼 인가로 가서 열차를 타라고 알려줬다. 곧 출발하니까 얼른 가서 타란다. 친절도 하셔라.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나를 구경하던 그녀를 불러서 플랫폼으로 걸어가자, 마침 리스본 북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 아잠부자로 가는 아잠부자 선 Linha da Azambuja 기차가 서 있다.




 오리엔떼 역에서 내린 우리는 바스쿠다가마 쇼핑몰 Centro Vasco da Gama을 통과해 떼주 강 Rio Tejo을 따라 있는 나쏘에스 공원 Parque das Nações에 갔다. 예전 1998년에 리스본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렸는데, 당시 박람회를 위해 조성한 공원이란다. 직역하자면 ‘국가들의 공원’이니까, 한국어로는 대강 ‘국제공원’ 정도의 뜻이려나? 지금은 시민들이 쉬거나 산책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되고, 콘서트 등을 열 수 있는 아레나와 커다란 아쿠아리움, 범선 돛을 닮은 멋진 호텔, 카지노, 과학체험 박물관, 그리고 다양한 음식점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포르투갈의 파빌리온 Pavilhão de Portugal이라는 이름의 건축조형물이다. 리스본 대학 명판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현재 건물 쪽은 대학 쪽에서 사용하는 듯하다.


 그나저나 오늘은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분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왔을 때는 강가를 따라 한창 공사 중이던 곳이 있었는데, 오늘 와 보니 강 위로 길이 나 있다. 목재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둔 것이다. 그녀와 사진도 찍었다. 강물 수면 바로 아래 떠있는 해파리를 그녀와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문득 앞서 걸어가 보기도 한다. 가만히 손을 잡고 잠시 멈춰 서서 바스쿠 다 가마 다리 Ponte Vasco da Gama를 잠시 눈으로 따라가 보기도 했다.


 숨 쉬는 공기가 깨끗하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이겠지? 숲이 전하는 싱그러운 공기는 아니지만, 비록 도시에서 맡을 수 있는 그런 내음이 진한 공기지만, 그래도 문득 가슴 깊숙하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어본다. 그녀도 나를 따라 깊숙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햇살이 있고, 바람이 있고, 강이 있다. 그녀가 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문득 느껴진다.


 ‘나의 존재’를 문득 인식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이런 사소한 재인식은, 평소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찾아온다. 어쩌면 혹은 아무래도 이런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산책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는 가지기 힘든, 산책하는 시간.








#3. 또다시 탕진잼, 꼰띠넨떼 - 미니양


 리스본에 오는 관광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구시가지인 알파마나 바이두 지역, 벨렝 지역에서 보낸다. 나도 처음 리스본을 찾았을 때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러 번 리스본을 찾게 되고, 또 한 달씩 살게 되니 리스본 사람들의 일상을 따라가게 되었다. 오리엔떼에서는 리스본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바스쿠 다 가마 쇼핑몰에서 쇼핑을 한다. 주변에 학교도 있고 방송국도 있고... 물론 관광객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시가지에 비하면 외국인들의 비율이 낮은 편이었다. 오리엔떼는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 같은 느낌? 구시가지와는 다른 새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런 곳이다.


 고래군과 나도 구시가지가 좋아 알파마에 집을 얻었지만, 구시가지 못지않게 오리엔떼를 좋아한다. 오리엔떼역, 파빌리온 같은 멋진 건축물과 강가의 탁 트인 시야와 바스쿠 다 가마 다리, 아쿠아리움, 그리고 커다란 쇼핑몰까지. 하루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오리엔떼에서 기분 좋게 산책을 마친 후에 마지막 일정으로는 쇼핑몰에 들러주는 것이다. 다리 이름과 같은 바스쿠 다 가마 쇼핑몰. 뭘 사는 것보다 구경하는 것이 좋고, 그중에서도 우리는 슈퍼마켓 가는 것을 좋아한다. 쇼핑몰 지하에는 '꼰띠넨떼'라는 아주아주 큰 슈퍼마켓이 있으니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꼰띠넨떼'에 들어서며 집에서 마실 와인이랑 오늘 저녁거리를 사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둘러보고 계산 후 밖에 나온 우리는... 탕진잼의 결과물을 양손 가득 들고 서 있었다. 

다 그런 거지, 뭐. 히히


탕진잼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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