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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r 12. 2019

빗속에 갇힌 이방인들의 몽상(1)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비 오는 날 고래군의 몽상- 고래군


 그저께는 에보라로, 그리고 어제는 오리엔테로 나돌아 다녔더니 많이 피곤했나 보다. 금요일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전화기도 오늘따라 잠잠하다. 덕분에 모처럼 늦은 시각까지 깨지 않고 잠들었다. 그러고 보면 리스본에 머물기 시작한 지 2주가 흘렀다. 아직 깊이 잠든 그녀를 두고 먼저 침대를 벗어났다.


 거실로 나오나 동굴 같은 작은 집에서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현관문 쪽이 소란스럽다. 마치 어젯밤 그녀가 오일을 두른 팬에, 장 보는 김에 모처럼 사온 소고기를 올렸을 때 나던 소리 같다. 어쩌면 어제의 그 소리는 사실 빗소리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문도 살짝 덜컹거린다. 문에 달린 창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지난 주말 수없이 보았던 로댕의 조각상들처럼 창문을 손에 쥔 채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온 세상에 비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파마Alfama 언덕 꼭대기 작은 집에 숨어서 창문 틈으로 몰래 내다본 바깥세상에는, 퍼붓는 굵은 빗줄기가 거센 바람에 실려 내려치고 있었다. 이 시각이 되면 집 바로 옆에 있는 벽화 앞에서 이 시각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가이드의 목소리 역시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나에게는 그저 빗줄기가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거센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뭇잎들끼리 마찰하며 나는 차라락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현관문에 달린 창문은 이중으로 된 여닫이창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각각 바깥쪽에는 유리창이, 그리고 안쪽에는 현관문과 같은 색으로 칠한 쇠로 된 창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른쪽 창문은 약간 고장이 나서 유리창과 쇠창문을 각각 닫지 못하고 모두 열거나 모두 닫아야만 한다. 다행히 왼쪽 창문은 멀쩡해서 유리창만 닫거나, 혹은 쇠창문까지 모두 닫거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일단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인 채로 커피머신에 캡슐을 하나 넣었다. 그리고 컵에 우유를 조금 덜어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흘러 시끄러운 알림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시간을 넉넉하게 해서 데운다. 그렇게 하면 중간에 멈춰서 덜 시끄럽게 데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깨우지 않고 드디어 머신에 내려주는 에스프레소 한 잔에 데운 우유를 무사히 부어넣을 수 있었다. 옅은 김이 올라오는 작은 컵을 들고 문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왼쪽 창문을 열고 유리창만 다시 닫았다.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다. 문득 오후가 되기 전에 항상 옆집에 있는 카페에 맥주를 배달하는 트럭이 집 앞에 멈춘다. 문득 이런 궂은 날씨에도 다들 삶을 살아가고 있었구나 싶어 지자,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적으로 세상이 모두 멈춰버린 것처럼 느끼고 있었나 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늘한 공기에 몸서리치며 그녀가 거실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한국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항상 안 좋은 일기예보만 잘 맞아떨어지나 봐. 비 엄청 온다요.”






#2. 잠시 비가 멈춘 지금이 기회야!- 고래군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했다. 나도 건너편에 앉아 노트북 앞에서 놀기도 하고, 침대에 잠시 누워 뒹굴거리기도 했다. 그나저나 집이 워낙 작다 보니 종일 붙어있자니 좀 갑갑하다.


 온종일 내릴 것처럼 세차게 퍼붓던 비가 오후 세 시쯤이 되자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네 시가 되어갈 무렵에 드디어 그쳤다. 나는 그녀에게 산책을 겸해서 장 보러 다녀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라? 비 그쳤다. 좀 갑갑하지 않아? 우리 장 보러 다녀올까?”

“어제 꼰티넨테에서 잔뜩 장본 거 벌써 까먹었어? 냉장고 작아서 들어갈 자리도 없다.”

“아니 그렇긴 한데…… 그냥 갑갑해서 산책할 겸해서 나갈까 했지. 저번에 심심해서 지도 보다가, 우리 가는 동네 리들 말고 다른 리들 또 있던데. 거기 가볼까?”


 그녀도 마찬가지로 좀 갑갑했나 보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러자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 리들Lidl은 알파마 언덕에서 북쪽 내리막길에 있는 페냐 데 프랑사Penha de França라는 동네에 있다. (성모발현 등의 기적과 관련된 큰 성당인 페냐 데 프랑사 성모 성당Igreja de Nossa Senhora da Penha de França이 있어서 동네 이름 또한 그렇게 지어진 모양이다.) 집에서 천천히 걸어가자면 대략 30분 정도 걸리려나?


 가는 중간에 그 동네에 길거리에 있는 식당에 잠시 앉아 커피도 마셨다. 그녀는 설탕 스틱을 반 조금 안 되게 넣고 마셨다. 에스프레소의 쓴맛에 단맛이 살짝 섞이니 더 맛이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그냥 마시는 게 좋다.



 지도를 보고 찾아간 리들Lidl은 최근에 새로 문을 연 모양이다. 매장이 상당히 넓다. 건물 자체도 최근에 지어진 듯하다. 카트를 밀며 잠시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오렌지주스와 과자 몇 가지를 담았다. 발포비타민을 여러 개 살까 하다가 한국에서의 가격이 궁금해졌다. 검색하려고 전화기를 꺼내보니 통화권 이탈이라고 뜬다. 으음……


 아마도 콘크리트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인데, 아직 통신사 중계기가 안 들어온 모양이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여긴 리스본이니까 그런 거겠지 하며 다시 카트를 밀며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아까 리들에서 샀던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그러고 보니 살짝 출출한 것도 같다. 한 조각씩 나눠먹으며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사파도레스Sapadores를 지날 무렵 다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내일까지 온다는 모양이다.






#3. 비 오는 날 미니양의 몽상- 미니양


 비가 잠시 그친 사이 그라싸 옆 동네로 가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저번에 왔을 때도 그렇고 사파도레스 너머로는 갈 생각을 못 해봤다. 꼭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사파도레스 시장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오늘은 사파도레스 너머 동네로 가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서 일까? 날이 흐려서 일까? 몸이 영 찌뿌둥하다. 사파도레스 너머 리들로 가는 길, 한적한 그 길을 걷다 카페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해도 처마가 있어 날벼락을 맞을 것 같진 않으니까. 귀찮은 마음에 고래군을 시켜(?) 에스프레소 두 잔을 받아오게 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진한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즐겼겠지만 오늘은 설탕을 넣어 달달하게 마시기로 했다. 커피와 함께 나온 설탕의 반 정도를 넣으면 적당한 단맛이 쓴맛과 함께 올라와 기분이 좋아지니까. 오늘의 좋지 않은 컨디션을 그렇게 끌어올려 본다. 그리고 리들에 들러 돌아오는 길, 좋아하는 감자칩을 입에 물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참 단순하구나.' 싶은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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