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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r 13. 2019

빗속에 갇힌 이방인들의 몽상(2)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리스본의 비 내리는 아침- 고래군


 그러고 보면 어제 세찬 빗줄기를 처음 마주하고 내가 경직되어버렸던 것은 어쩌면 일종의 공포 내지는 경외(敬畏)를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파마Alfama 언덕 꼭대기 즈음에 있는 우리가 머무는 이 집에서 내다보면 남쪽으로 저 아래 멀리 떼주 강Rio Teju이 마치 바다로 착각해도 괜찮다는 듯 넓은 폭을 자랑하며 넘실대고, 강 너머로는 세투발Setúbal 지역의 나지막한 고원지대의 북쪽 사면이 양 옆으로 펼쳐져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곳 언덕 위에서는 광활한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보인다.


 그 거대한 공간이 마냥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에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차있을 때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고 들뜨게 만드는지 모른다. 아마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제 그 사나운 빗줄기와 매서운 폭풍의 전율스러움이란, 그래 그게 바로 템페스트Tempest라고 부르며 유럽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 섞인 생각이나 간신히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하늘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보이는 모든 곳에 울려 펴지며 온 세상을 흔드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는 세상 전체에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여린 채로 놓여있는가를 깨닫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오늘 내리는 빗줄기는 매섭지는 않다. 어제 아침이 그 기억에 비교하자면, 오늘은 그래도 분무기 뿌린 듯 부슬부슬한 비가 허공에 차있는 느낌 정도로 포근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우리의 발은 잿빛 하늘이 세상에 펼쳐 뿌리는 비를 피해 작은 동굴을 닮은 이 집에 묶여버리고야 말았다. 세상을 방랑하는 이에게 비 내리는 하루란, 그저 모닥불 피울 수 있는 작은 동굴에 웅크린 채로 하늘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 어제 장도 봤고, 그녀는 이 기회에 밀린 일을 좀 해야겠다고 하니 말이다.


::: 비오는 날은 그냥 집에서 먹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일도 하고 그런거지, 뭐 :::


 그나저나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좁은 곳에 이대로 갇혀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냥 울적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바깥에 내리는 빗줄기는 포근하기 짝이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밑바닥에 들러붙어버릴 것만 같은 감정이 생기는 걸까.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냥 이런저런 몽상과 망상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실 다른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그것을 하지 않으려는 나 자신의 나태함과 그것을 외면하는 스스로의 위선에 대한 혐오감 때문일까.


 ‘포근하다’와 ‘우울하다’라…… 거기에 ‘혐오감’까지? 인간의 ‘감정의 움직임’이라는 의미를 가진 ‘정동情動Affekt/Affect’은,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운동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무한한 운동-이미지들을 인식하여 발생한 지각-이미지가, 또 하나의 ‘운동 중에 있는’ 나의 내면에 마련한 지평에 생긴 파동이 일으키는 감정-이미지들이 ‘포근하다’와 ‘우울하다’에 ‘혐오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나’라는 주체는 운동-이미지와 감정-이미지 사이의 경계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경계는 구분하는 것인 동시에 상호간에 교환이 발생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맑스가 『자본론Ⅰ』에서 언급한 ‘시장’의 개념에 빗대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란 결국 교환의 주체가 아니라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며, 재화나 상품, 화폐 등은 모두 이미지의 일종이 된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흔히 우리가 착각하듯 시각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각 너머의 ‘물자체’가 감각 너머로 건너와 형성하는 ‘표상’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흔히 ‘지평地平’이라고 번역하는 ‘horizon’은 ‘하늘과 지구가 맞닿는 선’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인식과 경험 영역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곳 알파마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끝자락을 가득 채우는 이 빗방울과 바람과 구름 그리고 ‘빈 허공’을 감각하여, 내 안의 지평에서 휘몰아치는 포근함과 우울함과 혐오감이라는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이 감정들의 움직임은 나의 내면에 수많은 진동과 울림을 만드는 파동이 되어 나의 표정과 말투와 눈빛, 그리고 판단과 행위 결정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운동-이미지가 되어 다른 감각주체들에 의해 표상될 것이고 말이다.


 무슨 뜻이냐고? 비 오늘 날 동굴같은 집에 갇혀서 우울하고 심심하다고요. 그나저나 오늘 아침 겸 점심으로는 뭘 먹지? 저녁에는 뭘 먹지?





#2. 리스본의 비 내리는 오후- 미니양


 좋은 말로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지, 사실 그냥 여행에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 생계형 프리랜서일 뿐이었다. 그래도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이런 저런 생활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인 것은 분명했다. 영국에 출장 겸 해서 떠나온 이번 여행 동안 유난히 바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어쩌면 더 바쁜 것도 같다. 간간히 비가오는 11월의 리스본 날씨는 나에게 작업할 시간을 내어주었다. 만약 해가 쨍쨍한 하늘이 예쁜 날이었다면 일 하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집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며 일도 하고, 보고싶은 드라마도 보고, 가득 찬 냉장고를 파먹으면서 지낸다. 집이 좁아 하루종일 머물면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머나먼 낯선 땅에 이 한 몸 지낼 곳이 있다는 것에 난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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