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연기와 화려한 무대, 그리고 작은 아쉬움
2019년 4월 5일부터 4월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가 이성열의 연출로 공연을 했다.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8년 쓰고 1943년 취리히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독자 또는 관객들로 하여금 판단력과 비판정신을 가진 사회 개혁의 주체로 스스로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만큼, 독일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는 <갈릴레이의 생애> 또한 ‘Agit Prop’(선전 및 선동을 위한) 문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에 있는 파도바Padova 대학의 수학 교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장래 학생이 되고자 찾아온 젊은이로부터 암스테르담에서 팔리고 있는 ‘망원경’이라는 발명품에 대해 듣게 된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있던 갈릴레오는 이것을 개량한 제품을 자신의 발명품이라며 베네치아 의회에 소개하고 급여를 인상 받지만, 그것이 네덜란드에서 먼저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게 된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달과 행성들의 변화를 ‘관측’하고,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의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이는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문이 돌고 있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대중들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갈릴레오는 이 관측 결과를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출판했다.
갈릴레오의 딸 비르지니아와 그의 학생 루도비코 사이의 약혼이 깨지게 된다. 루도비코가 결국 갈릴레오의 ‘비정상적인’ 생각과 거리를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바티칸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게 되고, 고문의 위협을 받게 되자 그의 학설을 부인하게 된다.
이제 노인이 된 갈릴레오는 사제들에게 감시받으며 작은 오두막에 구금되어 지내게 된다. 어느 날 그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방문하자 갈릴레오는 그동안의 과학적 발견을 정리한 책 『새로운 두 과학』을 맡기며, 그것을 해외로 밀반출해달라고 요청한다. 안드레아는 갈릴레오의 부인 행위가 사실은 과학 발전을 위한 영웅적인 행위였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며 안드레아의 믿음을 부인한다.
망원경,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본다는 것
연극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초 이탈리아는 전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당시 수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가 바로 연극의 주인공 갈릴리오 갈릴레이였다. 당시에는 학문의 위계가 신학> 철학> 수학의 순서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교회의 권위가 강한 시기였으며, ‘과학’보다는 ‘자연철학’이나 ‘과학철학’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학문 간 위계 속에서 ‘천문학’은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별들의 운항과 ‘하늘’의 형태에 관한 논의는 신이 세상을 어떻게 디자인했는가, 혹은 신의 의지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신의 생각과 의지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해석에 대한 논의였고, 그것이 바로 당시의 ‘천문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하늘의 형태와 별들의 운항에 관해 신의 의지와 철학적 타당성 대신 ‘관찰’을 토대로 삼는다. ‘망원경’은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의 한가운데 위치해, 작품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는 중요한 연극 장치로 무대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망원경은 ‘진실을 보는 것’을 은유하게 된다.
연극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기득권층이 별들의 운행과 우주의 형태에 관한 실체를 ‘직시’하는 것은 곧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 기득권층은 기존의 질서, 헤게모니의 근간을 구축하는 그 ‘아버지의 말씀’을 읽는 데만 눈을 사용하도록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아버지의 말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자들, 그리고 신과 예수라는 기표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물론 우리는 브레히트의 연극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연극에 대해 정확히 반대편에 서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공연의 몇 가지 문제들
2019년 한국에서 상연된 이번 공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지점은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된 부분들이다. 이성열 연출과 김주연 드라마트루기의 협업을 통해, 이번 공연 <갈릴레이의 생애>은 원작의 플롯을 훼손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덜어낼 수 있는 것들을 덜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짧게 장면들을 교체하는 현대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들에 익숙해진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인터미션을 포함한 170분이라는 상연 시간은 아마 상당한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고된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물론 이런 지루함을 환기시키기 위한 이성열 연출의 노력이 엿보이기는 했다. 코러스들의 노래, 뮤지컬적인 음악과 안무, 화려한 영상과 조명, 무대 구도의 다양한 변화 등, 공연 구성의 중간마다 독자 또는 관객들의 의식이 졸음 너머로 흘러가지 않도록 붙드는 장치들을 수없이 삽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호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은 김명수와 이호재 등의 중견배우들을 비롯한 국립극단 배우들의 뛰어난 기량이다. 발성은 대체로 훌륭했고 연기 역시 탄탄했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안드레아와 코시모 등을 연기한 어린 배우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만약 다음 공연이 또 있다면) 조금 더 고려해봄직도 하다. 충분히 훈련을 거친 흔적이 보였지만, 성장이 덜 끝난 신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역시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대의 구성 방식이다. 이번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의 무대는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 하나의 층을 더 마련해 설치한 회전하는 작은 무대의 형태로 구성되었다. 즉 이번 공연의 무대 공간은 ‘갈릴레오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이는 그 작은 무대는 ‘세상’이라는 전체 무대 안에서 회전하는 형식인 것이다. 작은 무대의 회전축이 하늘 위 어딘가로 비스듬하게 솟구쳐 있다. 이 하얀 봉 형태의 회전축은 아마도 ‘햇살’을 의미할 것이다. 즉 태양을 중심으로 무대 위 세상이 회전하고 있다는 은유적 구성인 것이다.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회전무대가 회전하는 바깥 면을 구성하는 벽을 갈릴레오의 연구를 빼곡하게 적은 필기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가득 채우고 있다. 좀 지나치게 ‘잘’ 정리되어 있는데, 심지어 화려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그 회전 벽 위에 걸린 거대한 스크린에 우주의 황홀한 이미지들이 몽환적인 형태로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극장 공간 전체를 품에 끌어안게 된다.
아쉬운 것은 이와 같은 공간 구성이 공연의 주제를 독자 또는 관객들을 진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의도보다는, ‘위대한 갈릴레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찬양’에 방점을 찍게 되는 효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물론 이번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공연에서 어쩌면 브레히트의 실종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원작이 가지고 있는 서사극적 힘은 여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번 공연이 그래도 ‘보다’ 보다는 ‘읽다’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 한국도
브레히트의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다. 진실은 언제나 기득권층들의 부조리에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브레히트는 갈릴레오의 대사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릴레이: 진리란 시대의 아이이지, 권위의 자식이 아닙니다. 1입방 밀리미터의 도형을 그려 놓고 봐도 우리의 무지(無知)는 끝도 없어요! 마침내 우리의 어리석음을 약간 덜 수 있게 된 기회에, 뭣 때문에 여전히 그렇게 그럴싸하게 현명한 척 하십니까? (후략)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中.)
간혹 사람들은 착각한다. 지금의 지식 체계와 과학 수준이 주장하는 것들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말이다. 그 착각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들면 질식 또는 저체온 증상을 보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라고 믿어온 이유이며, 온갖 보양식들을 섭취하면 어쩌면 조금 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도 믿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증명한다. 부패한 권력자들은 언제나 민중들이 어리석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지식과 학문이 그들의 하인 노릇을 하기를 원하며, 그들에게 권력과 부를 제공하는 민중들이 계속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당장 멈추기를 바란다. 그리고 ‘망원경’은 오직 자기들의 전유물로만 남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명한 이들은 항상 말해왔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고 말이다.
@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에서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예전 고려대 대학원총학생회에서 발행한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이 떠올랐다. 갈릴레오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 때문이었다.
갈릴레이: (전략) 또 나는 책 사는 것을 좋아하네. 과학 서적뿐만이 아니지. 그리고 나는 맛있는 식사를 즐긴다네. 훌륭한 식탁에서 대체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 (후략)
갈릴레이: 여보게, 내겐 여가가 필요하네. 증거가 필요해. 또 나는 고깃국을 먹기 원하네. (후략)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中.)
아직까지도 한국의 학문 체계는 학문을 쌓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온갖 부조리와 억압, 그리고 심지어 가난까지도 감내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야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학문을 연구하는 활동 역시 무형의 중요한 ‘생산 활동’이라는 인식을 싹틔우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극중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파도바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학문 현실은 여전히 암울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대다수 대학교들 역시 기업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구애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아직까지도 케케묵은 ‘사학법’이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고 말이다.
사진출처 : http://www.khan.co.kr/allthatart/art_view.html?art_id=201904191832011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6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