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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n 06. 2019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항상 고도는 오고 있다

무의미한 반복, 혹은 반복되는 무의미, 그래서 무한한 의미들



 2019년 5월 9일부터 6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 중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극단 산울림이 준비하고 임영웅이 연출하는 바로 그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1969년 초연 후 벌써 50년이 지났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원제: Waiting for Godot)는 ‘부조리극’ 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고도를 기다리며>, 원래 현실이 부조리하니까


 부조리극不條理劇은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함께 대표적인 ‘반反연극’ 형식의 연극 기법을 말한다. ‘반反연극’에서 말하는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전통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것은 기존의 연극 전통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난 연극운동을 의미한다.


 부조리극théâtre de l'absurde은, 원래 인간의 존재 양태가 부조리absurde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한 인간이 시공간을 점유하는 현상 또는 그 인간의 상황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인간이 행위하는 거의 대부분의 행동 역시 특별한 목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별한 목적과 맥락에 의해 존재하고 행동하는 비율은 그 인간의 삶 전체 안에서 극히 작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삶, 또는 현실은 ‘목적 없음’의 상태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연극이 만약 인간과 ‘세상’이라는 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 연극 역시 부조리한 상태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부조리극의 무대 또는 공간은 비이성과 모순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맥락은 사라지고 ‘무의미’가 반복된다. 이러한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고도Godot는 언제나 ‘도래 중’(到來 中/ 오고 있음)이다. 이 말은 결코 무대 위에 ‘고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지 않는 고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노예 ‘럭키’를 이끌고 나타나는 ‘포조’의 말과 행동 역시 맥락이나 의미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소년’은 매일 무대(라는 세상)을 찾아와, 내일은 고도가 올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 소식의 실현은 다음날 다시 유예되기를 반복한다.


 결국 연극을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의미한 반복, 혹은 반복되는 무의미밖에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무의미한 반복, 혹은 반복되는 무의미 안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그동안 현실의 장막 뒤편에 은폐되어있던 어떤 진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무한한 ‘고도’의 의미


 오지 않는, 혹은 오고 있는 ‘고도’의 의미는 결코 고정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 자체에 수많은 구멍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 구멍들은 일단 연출이나 각색하는 극작가에 의해, 그리고 동시에 배우들에 의해 채워지게 되고, 결국 언제나 마지막으로 독자 또는 관객들에 의해 마저 채워지게 된다.


 그래서 매 공연마다 ‘고도’의 의미는 달라진다. 어떤 배우가 어떤 해석과 스타일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가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모든 독자 또는 관객들마다 제각기 다른 기의들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같은 공연 안에서도 수많은 의미들이 발생한다.


 그러니 혹시 이 공연을 처음 보는 독자 또는 관객들이라면 그 ‘비어있음’에 놀라거나 지루해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그 여백들은 결국 객석에 앉아있는 독자 또는 관객들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니 말이다.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가장 큰 특징은, 비어 있는 무대 구성이다. 텅 빈 무대 중앙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게 전부이다.


 이 나무는 연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십자가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이 경우 ‘고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족종교에서 유래한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은유하게 된다. ‘고도’와 ‘메시아’는 언제나 ‘도래 중’이며, 또한 ‘부재하는 현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영웅 연출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중앙에 뒤틀린 작은 나무 한 그루만을 세워 놓는다. 그 작은 나무는 마치 동네 어느 산에 올랐다가 문득 만날 수 있는 어린 소나무를 닮았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할 수는 없다. ‘고도’와 마찬가지로 그 나무는 수많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어떤 언어에도 포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무대 위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다. 어쩌면 ‘고도’는 그 나무의 이름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혹은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블라디미르 ‘디디’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한명구 배우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만큼 철저한 분석과 고민을 기반으로 한 해석을 보여줬고,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많이 ‘디디’를 연기했던 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만날 수 있는 블라디미르는 정동환 배우와 이호성 배우가 연기한다. 다행스럽게도 독자 또는 관객들이 한명구 배우의 불미스러운 부재를 전혀 느낄 수는 없을 듯하다. 두 배우 모두 몇 차례 이 역할을 연기했던 경험이 있는데다가, 연기력 또한 탁월하기 때문이다.


@ 확실히 명동예술극장의 커다란 무대와 산울림소극장의 무대가 주는 느낌이, 서로 간에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다음번에는 산울림소극장을 찾아갈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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