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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l 21. 2022

책: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프랑스혁명의 문화사 ①

육영수, 돌베개, 2013.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역사학자인 육영수 교수의 책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프랑스혁명의 문화사』(돌베개, 2013)는 우리가 인상적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혁명’이라는 사건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인상과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혁명에 내재하는 실패의 숙명에 대한 마르쿠제의 말과, 혁명은 종국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체로 중요한 ‘문화적 기억’(1)으로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네그리·하트의 말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세력의 미숙이나 불균형이라는 이유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자기패배의 요소가 혁명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다. -허버트 마르쿠제 (7)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생산자 다중(multitude)의 형성은 20세기 혁명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중략) 20세기 혁명들은 패배당하기는커녕, 서로를 계속 전진하도록 했고 계급갈등의 조건들을 변형시켜왔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즉 제국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들을 제시해왔다. 혁명 운동들이 확립해왔던 리듬은 새로운 시대의 비트(박자), 즉 시대의 새로운 성숙과 변형의 비트다. -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7)     


 마르쿠제는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건들이 하나같이 처음 발생했을 때 추구하던 결과에는 이르지 못하고 변질되거나 실패하는 끝을 맞이해왔다고 본다. 어떤 혁명이든 처음에는 승리를 목적으로 삼고 저항의 행위와 실천으로서 시작되었지만, 마치 “자기패배의 요소가 혁명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처음에 추구했던 이상적인 승리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변질되어버리거나 실패해버리고는 결국 몇 페이지의 서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모든 혁명이 태생적으로 “배반당한 혁명”이라고 자조한다.


 반면 네그리·하트는 ‘혁명’에 대하여, 그것이 발생하기 이전과 이후를 분명하게 단절하는 ‘사건(event)’(2)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혁명’을 통해 첫째로 ‘저항을 체험한 다수’가 출현하고, 둘째로 ‘그 저항을 목격한 다수’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하트는 ‘혁명’에 대하여 ‘다중(multitude)’이 생산되는 시간(역사성)과 장소(공간성)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파악하는 셈이다. 여기서 ‘다중(multitude)’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물티투도(multitudo)’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밝혀내면서 확립된 용어이다. 네그리는 ‘다중’을 인민(people)이나 대중(mass)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그는 ‘인민’이나 ‘대중’이 정치권력에 포획된 익명의 다수성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면서, 반면 ‘다중’은 개별성을 유지하고 능동적 실천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는 ‘정치적 주체들의 결합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간주한다. 즉 ’다중‘은 기존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무질서하게 혼재하는 다수의 개성적인 정치적 주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나면, 비로소 이 책이 처음에 ‘혁명’에 관한 상반된 두 개의 관점, 마르쿠제와 네그리·하트의 관점을 가장 먼저 제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맑시즘은 실패했다고.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중국 등 사회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 앞에 패배를 시인하면서 이제 맑스가 이야기했던 공산주의 사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의미 그대로 ‘유토피아(U-Topia)’에 불과했다고.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혁명도 저항도 더 이상 불가능해져버린 것처럼도 여겨진다. 상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있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프린팅한 티셔츠나, 아니면 약산 김원봉의 이미지를 활용한 <암살>(2015)이나 <밀정>(2016), 또는 아나키스트를 표방했던 조선인 박열을 그린 <박열>(2017) 등의 상업영화 같은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본주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던 혁명이나 저항까지도 이제는 차라리 자본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여러 상품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혁명’에 관한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다중’으로서 일상생활 내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확립한다면, 모든 시민들이 각각 새로운 저항과 운동의 발원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책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1) 독일의 문화이론가 아스만은 어떤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이미지나 언어를 통해 구성 또는 재현(representation)되기’라는 형식을 통해 사건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형성되는 ‘기억’을 “문화적 기억”이라고 불렀다. (A. 아스만,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변학수·채연수 옮김, 그린비, 2011. 참조)


 (2)가브리엘 타르드나 베르그송, 들뢰즈 등 ‘사건(Event)’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철학자로는 바디우(Alain Badiou)가 있다. 바디우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참조하여 기존의 지식 체계(진리)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지식이 등장하는 현상으로서 ‘사건’을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사건’은 기존에 정의되지 못한 영역인 ‘공백’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며, ‘공백’에 내재하는 ‘식별 불가능성’을 주체가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저항의 운동성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추동한다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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