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돌베개, 2013.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혁명은 없다>는 표제를 달고 있는 1부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적 텍스트를 기존의 독해방식을 따르지 않고 여러 측면에서 재독해한다.
1부의 재독해 방식은 이러하다. 젠더의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대혁명’은 여성성을 억압하는 주체가 ‘왕족·귀족’에서 ‘부르주아’로 교체된 사건에 불과하다. 세 번에 걸쳐 수정된 「인권선언」 시리즈는 인권을 소유하는 시민의 범주를 설정하기 위해 ‘비(非)-시민’을 발명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던 식민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색인종들에게 있어 ‘프랑스대혁명’은 결코 혁명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들은, 어쩌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지식일 수도 있게 된다. ‘프랑스대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하여 ‘혁명’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작업이 누군가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지식의 생산이 권력과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이라는 이 책의 비판적 관점은 미셸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론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 등 수많은 변곡점을 가진 근현대사를 여전히 작성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2부인 <영상으로 서술한 프랑스혁명>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을 그린 몇 편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 분석에 대하여 역사적 서술이라는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 책은 역사를 다룬 영화에 대하여 ‘문자로 쓴 역사(historiography)’에 대응하는 ‘영상으로 쓴 역사(historiophoty)’로 간주하는 미국의 역사가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를 경유한다.
이 책이 먼저 독해하는 영화는 미국과 프랑스가 합작하여 제작한 <프랑스대혁명>(로베르 앙리꼬&리처드 헤프론, 1989, 이하 <대혁명>)이다. 여타 다른 영화들이 프랑스혁명의 어떤 특정 단면만을 소재로 채택한 반면, 이 작품이 “1788년에서 1794년 사이의 주요 사건, 제도적 변화, 역사적 인물 등을 시간 순서에 따라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시각언어로 서술”(89-90)했다는 것이 독해의 대상으로 채택된 이유이다. 그리고 프랑스 국방부와 문화부라는 국가 기관의 협찬을 통해 “영상으로 쓰인 ‘표준교과서’라는 의의”를 획득한 것도 채택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대혁명>의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은 “영웅열전”(92)과 “다큐드라마 혹은 역사적 로망스”(93)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학사적 분석”(96)이라고 되어있는 <대혁명>에 대한 맥락적 분석, 즉 “이데올로기적 의도와 효과”(97)에 대한 분석이다.
우선 <대혁명>은 동유럽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의 말기적 모순이 노출되던 1980년대 말에 두드러졌던 정통(마르크스)주의 해석의 퇴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공포정치와 로베스피에르→1848년 혁명의 6월 봉기→파리코뮌→러시아혁명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어지던 ‘혁명의 교리문답’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혁명 200주년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97)
위의 서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화 <대혁명>은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유럽 이데올로기의 욕망, 즉 정통 맑시스트나 소비에트연방이 제안하는 ‘급진적인 혁명’을 뭔가 나쁘고 위험한 어떤 것으로 느끼게끔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듬뿍 담긴 영화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책은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 번째 근거는 혁명의 실질적인 동력이었던 프랑스혁명의 민중들이 “혁명적 대중과 반혁명적 폭도의 양면성”(98)의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대혁명>은 사회 변혁을 원하는 비판적 시민 주체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야비한 기회주의자”(98)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스크린 위에 투영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또 하나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미국적 가치관의 대변자”(100)라는 ‘당통’의 캐릭터성과 “공포정치의 폭력”적 인물이라는 ‘로베스피에르’의 캐릭터성이다. 당통은 적당히 부패했고 타협적이며, 지극히 현실지향적인 동시에 가정적인 아버지이며 전원을 사랑하는 남성이라는 캐릭터성을 부여받고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매우 모범적인 미국적 ‘보통사람/정치인’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반면 로베스피에르에게 부여되는 캐릭터는 바로 소비에트의 정점에 위치한 ‘스탈린’의 이미지로, 무엇보다도 영화의 제작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이 함께 매달렸다는 사실을 함께 주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이어지는 내용은 영화 <메리쿠르>와 <슈앙>(1988)에 대한 분석이다. 책에 의하면 <메리쿠르>는 “페미니스트의 일생을 다룬 악의적인 반페미니스트적 작품”(115)이다. 그 이유는 한 여성혁명가의 일생을 의도적으로 오염시킨 이미지로 서술함으로써 “그것은 ‘혁명은 여성들이 노리개로 유희하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위험한 현실이다’라는 경고”(116)를 영화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슈앙>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청춘남녀들의 삼각관계를 담은 애정극 혹은 어드벤처 영화”(119)라고 소개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원래 의도와는 달리 오염되고 실패로 귀결된 원인들 중 하나는 ‘못된 여성’들 때문”이라는 메시지가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이 작품 또한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20세기 말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들, 프랑스혁명 내부의 어딘가에 배치된 여성에 대한 그 두 편의 영화들은, 영화가 제작된 20세기 말 당시의 프랑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한 생각과 가치관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와 여성은 서로 결코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영화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석하는 영화는 <나폴레옹>(1927)이다. 이 책은 영화가 프랑스혁명에 대해 취하고 있는 모호하면서도 이중적인 태도가 감독인 아벨 강스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성, 즉 좌파와 우파 사이의 경계적 주체성 혹은 바깥의 주체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동시에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영화 이미지들을 통해 ‘나폴레옹’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두텁게 묘사됨으로써, “새로운 역사인식의 창출”(145)이라는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평한다. 특히 ‘흑백 무성영화’라는 이 작품의 형식이 오히려 지금의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자유롭고 주관적인 영화적 경험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영화를 읽거나 보는 수용자가 컬러의 결핍이나 언어의 결핍에 의해 영화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이미지와 의미들을 스스로 생성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책의 3부는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전환>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지배적인 실증주의 역사학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한 문화역사학의 관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을 다룬 학자들의 책과 연구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3),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극장에 마련된 ‘파르테르(parterre)’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당대의 정치 담론이 조직되는 과정과 정치인이 과장된 배우의 언어와 몸짓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원인을 고찰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는 <프랑스 혁명과 민중공연문화의 ‘문명화과정’>이 실려 있다.
3) 3부에서 소개하는 역사학자와 책은 다음과 같다.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의 『프랑스혁명의 해부(Penser la Révolution française)』(1978), 모나 오주프(Mona Ozouf)의 『혁명축제(La Fete révolutionnaire, 1789~1799)』(1976), 모리스 아귈롱(Maurice Agulhon)의 『마리안느의 투쟁(Marianne au combat : l'imagerie et la symbolique républicaines de 1789 à 1880)』(1979), 린 헌트(Lynn Hunt)의 여러 연구들, 뤼제브린크(Hans-Jürgen Lüsebrink)와 라이하르트(Rolf Reichardt)의 『바스티유: 전제주의의 상징과 자유의 역사(The Bastille: A History of a Symbol of Despotism and Freedom)』(1997), 로라 메이슨(Laura Mason)의 『프랑스혁명을 노래하다: 대중문화와 정치(Singing the French Revolution: Popular Culture and Revolutionary Politics in Paris, 1789-1799)』(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