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잡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했다
2022년 10월 25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대학로 플러스시어터에서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가 공연 중이다. 마침 10월 29일 공연에서 와타나베 역에 평소 좋아하는 서현철 배우가 캐스팅 되어있어, 오랜만에 대학로를 찾아가 관람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10년에 영화감독을 연극무대로 끌어오는 실험을 했던 프로젝트 ‘감독 무대로 오다’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감독 장항준이 희곡을 쓰고 연출했던 <사나이 와타나베, 완전히 삐지다>가, 12년이 흐른 올해부터 내년까지 <사나이 와타나베>라는 제목으로 다시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는 무대에 올리기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무난하고 훌륭한 편이었다. 서현철 배우는 겉으로는 거칠지만 속은 여린 와나타베 신이치를 코믹하게 그럭저럭 잘 표현해냈다.(커튼콜 때 다소 아쉬워하는 서현철 배우의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유수빈 배우도 힘들지만 꿈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 영화감독 ‘만춘’의 애환을 그럭저럭 잘 보여줬다. 다중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임진구와 정다함 두 배우도, 비록 야쿠자라고 보기에는 정말 너무 부드러운 이미지였지만, 여러 캐릭터들을 상당히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다만 <사나이 와타나베>는
몇 가지 오류 내지는 엉성한 구석이
눈에 걸리는 작품이었다.
예를 들어,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리는 재일(在日) 한국인/조선인들은 대체로 저마다 일본식 이름과 함께 한국식/조선식 본명을 가지고 있다. 극중 와타나베의 어머니가 아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경우 한국식 이름으로 아들을 부르거나 아니면 일본식으로 부르더라도 ‘신이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했어야만 했다. 어쨌든 친모가 아들을 부를 때, 일반적으로 ‘와타나베’라는 성으로 호칭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원작 희곡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한국의 연극작품이 자이니치나 일본식 문화에 관해 자세하게 고증하고 재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왕 무대의 초점을 ‘와타나베’라는 인물에 맞추고 있다면, 심지어 작품의 제목에까지도 표기를 하고 있다면, 최소한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을 법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려를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 이전에 애초에 왜 하필 자이니치인가도 문제인 것 같다. 가난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자 하는 영화감ㅋ독 ‘만춘’(유수빈 분)은 아무래도 원작자 스스로의 자기표현에 해당한다고나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나이 와타나베>가 표제로까지 내세우고 있는 ‘와타나베’라는 캐릭터, 즉 자이니치/ 야쿠자 오야붕/ 차별과 억압/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인물/ 아버지를 상실한 트라우마 등으로 나타나는 캐릭터를 통해, 도대체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처럼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일 관계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이 확실해보이고, 일본 내에서 자이니치가 지금도 겪고 있을 차별이나 디아스포라성 같은 것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야쿠자라는 일본 문화의 단면을 (충분한 연극적 의미와 현상으로 나타나는) ‘연극적 장치’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그리고 무대구성도 솔직히 아쉬웠다. 무대의 배경에 사선으로 표현된 프레임은 아마도 원작자의 영화적 정체성과 영화감독 ‘만춘’이라는 캐릭터성, 그리고 영화적 연극이라는 이미지를 공간화하기 위한 것인 모양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어떤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프레임 형상을 중심으로 무대 배경에 나타나는 (그림자 등의) 이미지나 색채 변화도 솔직히 다소 밋밋한 편이어서 어떤 연극적 장치로서도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와타나베’를 시모노세키 일대에서 활동하는 야쿠자의 보스로 설정했다면, 그에 따른 미쟝센이 어느 정도는 마련되었어야만 했다. ‘와나타베’의 의상은 야쿠자 보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이했다. 하다못해 조직원들에게라도 만춘을 좀 더 사납게 위협하는 야쿠자스러운 무대 액팅이나, 아니면 손에 든 무기 등으로 뭔가를 때려서 큰 소음을 만들어내는 소품 활용이라도 좀 준비해주기라도 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뭐랄까,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무대에 올려놓다 보니 결국 연극적인 어떤 것이라고는 그저 ‘배우의 코믹한 연기’ 말고는 나머지 모두가 좀 부족하고 아쉬운 작품이었던 것 같다.
사진출처 : http://mbiz.heraldcorp.com/view.php?ud=20221019000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