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고래 Dec 03. 2022

연극 <벗>

체홉과 브레히트 사이에서


  새로운 연극 한 편이 2022년 12월 1일부터 11일까지 한양레퍼토리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북한 소설가 백남룡의 동명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벗>이 그것이다. 원작소설 <벗>은 영어 및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 많은 주목과 찬사를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찍이 신명순의 <전하>를 각색한 <전하의 봄>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해성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사람과 삶이 있더라, 특수성과 보편성의 이중나선     


  플롯을 이끌어가는 것은 두 집단의 부부인데, 하나는 판사인 ‘정진우(정나진 분)’와 그의 아내인 육종학자 ‘한은옥(변신영 분)’이고, 다른 하나는 선반공인 ‘리석춘(문종철 분)’과 가수인 ‘채순희(이송이 분)’이다. 그리고 두 개의 가족공동체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사이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은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몇 개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개인의 발전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해야만 한다.’는 문장이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열화(劣化)한 상태인 남한의 ‘상식’으로는, 개인의 발전은 개인 또는 소규모 혈연·가족 집단의 부(la richesse)와 권력(le pouvoir)의 증대에 연관될 뿐이다. 이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은 이 연극에서 북한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삶에 나타나는 연인 사이의 사랑과 갈등, 가족애, 우정과 연대 등의 가치들은,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먼 영토에도 일종의 ‘인류적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여기뿐만 아니라 ‘저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새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특히 북한과 남한 사이의 언어적 친연성으로 인하여 더욱 특별한 요소로 다가오게 된다. 남한의 언어가 아닌 현지의 언어로 직접 발화하는 대사의 의미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가 아닌 ‘저기’의 낯섦이 기저에 깔려있는 와중에도 무대 위 세상의 언어와 행위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꽤나 특별한 연극경험이기 때문이다.     


판사/벗, 그리고 판사의 언어/벗의 말     


  이 작품의 가장 큰 생명력은 바로 ‘언어’와 ‘캐릭터’에 있다. 이것은 원작소설이 가진 힘이며, 동시에 연극 <벗>에서 가장 눈부신 부분이기도 하다.


  이 연극에는 무대 곁에서 반도네온의 소리로 극장을 채우는 ‘연주자(이어진)’와, 차분하고 분명하게 소설의 묘사와 서술을 읽고 언술하는 ‘해설자(김봄희 분)’ 캐릭터가 존재한다. 여기에서 해설자가 읽어주는 소설적 묘사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힘을 강하게 발산한다. 이것은 ‘살아있는 언어가 가지는 생동적(生動的) 힘’과는 다르게, 오직 다양한 어휘가 적절한 위치에 놓임으로써 의미를 선명하고 적확하게 만들어낼 때에만 발산되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특히 문자로 종이에 박제된 소설적 언어가 아니라 배우의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동시에 휘발되는 연극적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연극성과 극장성’에 관한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캐릭터 면에서도 한 명의 입체적 인물과 나머지 매력적인 전형적 인물들이 알맞게 배치되어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는 ‘정진우/한은옥’ 부부와 ‘채순희/리호남/리석춘’가족이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본다면 전체 플롯을 이끌어가는 것은 ‘정진우’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정진우’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가치는, 한 배우의 신체에서 ‘판사의 언어’와 ‘벗의 말’이 동시에 출현한다는 연극적 현상에 있다.


  판사라는 직업이 직접적으로 법을 다루고 인민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진우’는 국가권력과 사회구조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제유(提喩, synecdoche)적 캐릭터이다. 동시에 그는 ‘리혼소송’을 제기한 ‘리석춘’과 ‘채순희’부부와 그들의 자녀인 ‘리호남(손아진 분)’의 삶과 고민을 듣고 공감하는 벗이기도 하다. 연극의 시점이 대체로 ‘정진우’의 행적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는 소설로 치자면 일종의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인물에 해당하며, ①‘리혼소송’을 심사하는 판사/ ②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벗뿐만 아니라, ③척박한 고향에 재배 가능한 남새(채소)를 육종하고자 하는 꿈을 전력으로 추구하느라 상대적으로 가정에 소홀한 ‘한은옥’의 남편이라는 입체성을 가진 인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나머지 인물들이 대체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정진우’의 입체성을 더욱 부각하는 동시에 작품의 서사를 비교적 이해하기 쉽도록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또 하나 매력적인 캐릭터는 ‘리호남’이다. 그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법과 질서 등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거리낌 없이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극중 가장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리호남’은 무대 위에서 마리오네트와 배우의 신체(손아진)가 결합한 형태로서 표현되면서, ‘생명력과 가능성’이라는 캐릭터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체홉, 끄트머리에 달린 브레히트     


  일단 원작이 소설이니만큼 연극 <벗>은 매우 두드러지는 서술성을 보여준다. 짐작해보자면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아마도 이 점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의 서술성을 연극적 극장성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서술성과 극장성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에 서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전반적으로는 체홉의 사실주의적인 무대를 보여준다. 이 점은 원작소설이 톨스토이나 체홉과 같은 형식과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무대에서 장편소설을 그리느라 전반적으로 고전극 같은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대예술은 극중 시간적 배경이 1988년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연극 <벗>은 그 외부에 브레히트적인 서사극성을 액자처럼 두른다. 연극 <벗>에는 배우가 객석에 말을 걸면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는 점, 무대와 객석 사이에 해설자(erzähler)가 배치된다는 점,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 제4의 벽을 허물어버린다는 점 등이 서사극적 장치로서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연출이나 드라마투르그에게 아쉬운 점은 해설자의 비중을 좀 더 키웠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해설자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소설의 서술과 묘사를 전달하기만 하고 적극적인 개입과 언술은 막판에만 잠깐 드러내면서, ‘작가적 해설자(auktorialen erzähler)’를 수행해내지는 못하고 서사극성이 두드러지게 발현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극중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기보다는 차라리 해설자와 대화를 하게 만든다거나, 해설자가 먼저 개입해서 설명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역할을 부여했다면, 지금처럼 서사극성이 연극 결말부에 난데없이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액자처럼 제대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이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