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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Sep 15. 2023

연극, <뉴클리어 패밀리>

아직은 이도저도 아니라서 아쉬운 작품



 2023년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대학로 시온아트홀에서 연극 <뉴클리어 패밀리>(작, 연출 장명식)가 상연된다. 이번 공연이 초연이다.          


1막: 가족 / 2막: 핵폭탄     


 이 작품의 플롯은 전반부의 가족 서사 부분과 후반부의 핵폭탄 서사 부분으로 구조화할 수 있다.


 중심인물로 네 명의 가족이 등장한다. 동성애자(호모 섹슈얼리티)인 아빠(김두은 분), 전업주부인 엄마(이경성 분), 성전환자(트랜스젠더)인 딸(이지혜 분), 그리고 만년취준생인 아들(사현명 분).


 아빠는 이혼 후 동거를 요구하는 동성의 연인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딸은 성전환 수술을 위해 유튜브 모금 활동 중이다. 아들은 사업가인 친구에게 취업을 부탁했다가 해외 유학으로 학벌 세탁을 하면 고용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세 명에게 각각 엄마가 오늘 저녁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을 한다. 엄마가 할 말이란 전업주부를 그만 두고 한국을 떠나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욕망을 밝히고 다투는 와중에, 한국에 갑자기 핵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무대를 덮치고 그 순간부터 무대가 전환된다. 소수자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가정집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면 고통스럽게 죽는 디스토피아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후반부의 중심 사건은 정부로부터 한국의 대통령이 100명의 생존자를 선별할 것이며, 여기 네 가족 중에서는 한 명만 구출할 것이라고 통보 받는 데서 시작된다. 생존자를 자체적으로 선별하기 위해 네 가족은 게임을 통해 한 명씩 차례대로 죽을 사람을 선별하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엄마를 문밖으로 밀어내면서 연극은 종결.


          

이도 저도 아니다     


 작가이자 연출인 장명식은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아마도 각각의 인물들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다종(多種)의 이데올로기들을 무대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성적 소수자인 주체를 구별해내는 젠더 이데올로기, 그리고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작동만이 나타날 뿐이다. 더구나 그것마저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거에 짓뭉개져서 무대 바깥으로 갑작스럽게 내던져지고 만다.     


(※ 국가주의: 국가를 가장 상위의 가치로 인식하고, 국가권력이 경제와 사회 등 제반 사항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 국가통제주의라고도 불리며, 이것을 극단화한 것이 전체주의(파시즘).)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억압과 차별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냥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는 악에 받친 고함 뒤로 던져지고 만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안에서 주부의 역할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 하는 해묵은 문제도 ‘힘들다’는 서술어로 대충 표현되어 버린다. 번듯한 대기업 취업에 목매다는 저학력자 청년 실업자의 욕망이나 사회적 모순 사이의 충돌 같은 것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로 때워 버린다.


 이걸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이를테면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주체가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해보거나 상상을 해보거나 하다못해 그러한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체험해보지 못한 남성의 신체를 욕망하는 주체가 생리통과 같은 여성성이 나타나는 스스로의 신체에 대해 어떤 종류의 정동을 보여주게 될 것인가의 문제라든가, 아니면 일가족을 거느린 가부장적 남성 가장이 중년이라는 사회적 연령에 놓인 상태에서 동성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 순간 시작하고 지속해야만 하는 한국을 지배하는 거대 담론에 대항하는 외롭고 공포스러운 투쟁에 관한 문제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 이 연극은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뉴클리어 패밀리>의 무대에 나타나는 청년 취준생은 그냥 철없는 애새끼에 불과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중단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여행을 선언하는 엄마는 별다른 대안이나 대책도 없이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소시민 그 이상은 절대 아니게 된다.          



차라리 한 편의 블랙코미디면 좋았을 것을     


 이에 더해, 그리고 도대체 거기에 갑자기 왜 국가의 폭력이 개별 주체를 한꺼번에 억압하는 상황을 무대 위에 던져넣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무대 위에 던져진 주제들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보여주기도 벅찬 상황에서, 그 모든 갈등과 모순을 단번에 때려 치워버리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해묵은 냉전 체제를 나타내는 거시역사적인 기표, ‘핵폭탄’이라는 거대 폭력의 기표, 그리고 무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한국적 국가권력의 통치성을 직유하는 기표를 동원함으로써, <뉴클리어 패밀리>는 갑작스럽게 무대 위 인물들을 서로의 죽음과 삶을 결정하는 게임으로 몰아넣는다. 이제 그들의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모순은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을 재현하는 것 외의 다른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파국(Catastrophe)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죽음의 순간이라면 반드시 보여줄 것이라고 예상되는 고뇌하고 비장하고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는 따위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웃기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비장하지도 않고, 애처롭지도 않고, 분노가 차오르지도 않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2막의 핵폭탄 부분을 철저하게 희극(Comedy)으로 구성했다면 오히려 근사한 블랙코미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내재하고 있는 비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생성되는 희극성이라는 가능성이, 작품의 구조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이 초연이다. 거기다 신진연출가 지원작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고 보면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극장에는 피니어스(Finneas)의 <American Cliché>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뭔가 의미가 있었던 걸까? 설마 다음 가사를 빌려 쓰고 싶었던 걸까?     


       I say, “How'd I get along, so alone without you”

       And you say, “Same”

      난 말했지, “내가 어떻게 혼자가 되겠어, 그래서 너 없이 외롭게”

      그리고 넌 말했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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