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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l 11. 2023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

미디어, 메타미디어, 그리고 메데이아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2023년 7월 9일(월)부터 16일(일)까지 성수아트홀에서 <메디아 온 미디어>(김현탁 연출)를 상연한다. 2011년 초연 이후 여러 나라에서 열린 국제연극제에도 초청받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김현탁 연출과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2015년 작품인 <잠자는 변신의 카프카>를 인상 깊게 봤던 터라 더욱 기대가 되는 공연이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짧고 경쾌한 단막들이 재미있게 이어진다. 단막 각각의 길이도 적당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전체 상연시간이 아주 길지 않은데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은 신나고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도 재미있다. ‘아방가르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아주 해체적이거나 추상적이지는 않아서, 다른 행위적이거나 표현적인 작품들과 달리 그다지 난해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굳이 찾아가야 하는 대학로가 아니라, 더러는 지금 살고 있는 곳 근처이기도 한 ‘성수아트홀’에서 상연한다.     


내 삶은 내가 살아감이기에, 메데이아     

 

 일단 이 연극을 재밌게 보기 위해서는 원작인 <메데이아>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두는 것이 좋다.

    

 지금의 조지아 흑해연안에 위치해있던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의 딸이자 반신(半神)이기도 한 ‘메데이아(메데아 또는 메디아)’는 원정항해 중인 아르고호를 타고 온 수많은 영웅들 중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의 조카인 ‘이아손’과 사랑에 빠진다. 이아손은 콜키스 왕국의 보물 황금양털을 획득하기 위해 원정을 온 것이다.    

 

 사랑에 빠진 메데이아는 왕이 이아손에게 제시하는 수많은 퀘스트들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도록, 그에게 닥쳐오는 온갖 고난과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은 메데이아 본인의 힘과 능력으로 거의 다 처리해놓고 이아손이 막타만 치는 방식이긴 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결혼하여 남편 고향 이올코스로 이주했다. 그런데 남편의 숙부가 퀘스트를 완료하면 왕위를 주겠다는 약속을 안 지키자, 그 숙부를 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쪽 코린토스로 추방당했는데, 이번엔 이아손이 코린토스 왕의 딸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본래부터 능력 좋던 메데이아가 그들 모두에게 처절하게 복수한다. 심지어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게까지도.     


 <메데이아>에 관한 옛날 사람들의 해석은, 아마도 그녀가 한없이 비정하고 잔인한 여성이라는 평가로만 채워졌을 것이다. 이 작품이 영웅 이아손이 위대한 모험을 완수했지만 비정한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참혹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 나쁜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메타미디어로서의 연극과 삼중구조의 수행성     

 <메디아 온 미디어>를 더 즐겁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구조를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연극의 내용은 고대 아테네의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여러 개의 짧은 ‘막’으로 분할한다. 하나의 ‘막(幕, Act)’은 각각 근현대적인 매스미디어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1막의 TV를 통해 전달되는 기자회견을 비롯해서, 근대적 무성영화, ‘구피’나 ‘트위티’와 같은 월트디즈니의 루니튠즈(Looney Tunes) 캐릭터들로 구성되는 애니메이션, 블랙과 화이트의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홍콩 스타일 느와르 영화, 오프라 윈프리 쇼(The Oprah Winfrey Show)나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를 연상시키는 라이브 TV 토크쇼, 디아블로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등을 연상시키는 실시간 롤플레잉 온라인 게임, 가수나 아이돌 밴드의 공연을 하나씩 송출하는 TV 음악프로그램, 그리고 아마도 이번 공연에 새로 편성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 유튜브 라이브스트리밍 등이 각각의 막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이해해도 충분히 이 연극은 재미있다.     


 그런데 사실 무엇보다도 독자 또는 관객들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 연극 <메데아 온 미디어>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막과 막 사이 배우들이 의상을 갈아입고 소품을 배치해 무대를 준비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무대 위에 하얗게 표시된 내부 영역의 ‘바깥’에서 수행되는 막과 막 사이 배우들의 행위와 정돈된 침묵은, 독자 또는 관객들이 소란스러운 막(Act)의 내용(Acting)이 실제가 아닌 가상이며 현실이 아닌 극적 재현이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극적 환상으로부터 이탈시킨다는 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메타드라마적 서사극 장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연극(Theatre)’은 일종의 ‘메타미디어’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주체성을 나타내는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세계라는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은유와 결합하여,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즉 우리가 ‘나’라고 간주하는 것이, 사실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거대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키치와 푼크툼의 알레테이아     


 <메데아 온 미디어>의 무대 위 재현은 자주 어긋나고 삐걱댄다. 효과음과 행위는 일치하지 않고 자꾸만 서로 빗나간다. 잘 훈련된 배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음에도, 무대 위에서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는 등의 의도적인 ‘실수’도 보여준다. 영화 등의 현대적인 미디어를 보여줄 때마다 언제나 그 바깥을 함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화적 프레임의 외부에서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모습이나 라이브스트리밍을 모니터 너머로 보면서 키보드를 휘두르고 있는 ‘전사’들의 모습을 동시에 무대화하는 것이다. 정확한 사실주의적 재현을 거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전위적인 연극적 이미지 생성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사이의 경계를 집요하게 추구하고 그것을 무대 위로 확장하고자 한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무대와 객석을 포함하는 극장의 공간성은 극적 환상과 이데올로기적 현실 사이에서 꾸준하게 은폐되어왔던 사이 공간, 맑스가 ‘시장’이라고도 표현했던, 기존의 가치가 상호 교환되고 새롭게 전환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교환되고 전환되는 그 모든 가치들(연극적 이미지들)이 마치 싸구려 제품들처럼 가볍고 유치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진지하다’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형 양식을 ‘키치(Kitsch)’라고 부른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도 부르는 고전에는 귀족적, 고급스러운, 희소한, 값비싼 등의 기호들이 결합되어 있다. 즉 그것은 그 자체로 계급이나 계층에 관하여 인간을 분류하고 물화(物化, Verdinglichung)하려는 무의식을 재생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키치’는 이것을 전복하고자 하는 미학적 운동이자 양식을 말한다. 고전 중의 고전 텍스트인 그리스 비극을 키치적으로 무대화한다는 것은, 연극 <메데아 온 미디어>가 주체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에 왜곡되기 전의 실제 자연과 본연적 자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무대 위에 나타나는 키치적 연극이미지는, 롤랑바르트가 사진 분석에 관하여 내놓았던 ‘스투디움/푼크툼’ 개념과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스투디움(Studium)’은 기존의 담론이 이미 마련해놓은 해석을 말한다. 메데이아에 관한 해석, 미디어에 관한 해석, 그리고 연극에 관한 해석들이 이 세계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에 간혹 나타나기도 하는 작은 부분들, 스투디움을 전복하는 일종의 얼룩이나 찢김과도 같은 의도하지 않은 작은 요소들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푼크툼은 담론의 논리와 질서에 종속되지 않고 그 대신 개인의 과거 경험이나 무의식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의미와 감상 경험이다. 이것은 제도권 내에 종속된 작품보다는, 아웃사이더 예술이라고도 부르는 아르 브뤼(Art Brut) 계통의 작품들에서 조금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메데아 온 미디어>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이 발견할 수 있는 어긋남과 삐걱거림, 미처 치우지 못하고 남겨진 흔적들, 프레임 바깥에 관한 체험적이거나 비체험적인 인식의 결과들은 일종의 푼크툼처럼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지배적 담론이 세운 질서와 규칙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함으로써, 생각의 방향을 강제하고 삶의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고전텍스트와 스투디움적 해석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는 그것에 대항하는 키치적 텍스트와 푼크툼적 해석을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 철거,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훔쳐보기, 그러고 보면 진실 또는 드러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망각과 은폐를 뜻하는 레테(Lethe)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 한편, 올 11월에는 미국 공연도 예정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인들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미국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에게 더욱 익숙한 TV 라이브 토크쇼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 배우들이 정말 고생한다. 그런 작품들이 있다. 어쩐지 배우를 혹사시킬수록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린 듯한 그런 작품들.     


※ 여러모로 직전에 관람했던 극단 수수파보리의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가 떠올랐다. 두 작품이 모두 최대한 가볍고 재미있게 무대를 구성하는 와중에도 그 안에는 사실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의식이 숨겨져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주제의식을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그냥 재미있게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서로 다른 형식의 단막들이 나열되는 일종의 피카레스크 스타일 구성이 정말 특징적이라고 느껴졌다. 매 공연마다 당대의 문제적 미디어를 새롭게 교체 및 삽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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