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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Aug 01. 2024

전시 <낮은 휘파람, 박제된 손>

수림큐브 2024년 6월 13일-7월 27일


 서울 창덕궁 인근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수림큐브’에서 2024년 6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낮은 휘파람, 박제된 손》이라는 표제로, ‘정수’와 ‘김희욱’ 두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A4용지에 인쇄된 팜플렛을 볼 수 있다.     


다목적 문화공간인 ‘수림 큐브’는 각각의 층마다 중앙 계단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하나씩 공간이 배치된 좌우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형태가 ‘루빅스 큐브(Rubik's Cube)’를 닮았다는 뜻에서 이름에 ‘큐브(Cub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듯하다.     


1.

 건물을 바라보고 섰을 때, 1층의 오른쪽과 2층 왼쪽에 ‘정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1층의 왼쪽과 지하공간에 ‘김희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 한 명씩 나눠서 순서대로 관람한다면, 독자 또는 관객들이 세 개 층을 오르내리면서 건축물 내부 여기저기를 이동하게끔 동선이 짜여있다. 이는 전시관에 있는 각각의 독립적 공간들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있음을 독자 또는 관객들이 체험하게 만든다.     


김희욱, <탑(Tower)>, 2024. 가변설치. 스티로폼, 에폭시 퍼티, 수성 도료, 플라스틱 볼, 바니쉬


김희욱, <탑(Tower)>, 2024. 가변설치. 스티로폼, 에폭시 퍼티, 수성 도료, 플라스틱 볼, 바니쉬



 이러한 구조는 김희욱의 작품들 중에서도 <탑(Tower)>이라는 작품에 묘한 효과를 더해주게 된다. 일단 이 작품은 양치류나 달팽이의 촉수를 연상시키는 유동적인 형상의 원기둥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가지를 연결하는 몸통인 줄기(Trunk)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움직이는 어떤 생물로 뒤덮인 기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품의 색은 마치 산불이 지나간 숲에 잔해로만 남은 어떤 것처럼, 칙칙한 까만 색으로 뒤덮여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상을 그대로 가진 채로 지하에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보러 가게 되면, 이번에는 그곳에서 같은 제목의 작품을 재차 만나게 된다.    

‘지하 공간에서 이 작품의 나머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특별했다. 어쩌면 이러한 배치 형식이야말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 자체일 것이라는 영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상과 지하, 즉 위/아래라는 수직적 공간 배치(외적 형식)는 ‘수직으로 쌓아 올림’이라는 작품 내적 형식과 서로 강하게 얽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즉, 지상과 지하의 각각의 작품은, 비록 별개의 공간에 위치해 있지만, 사실은 ‘분리된 공간성을 가진 단일한 작품’이라는 독특한 인식론적(Aesthetic) 의미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로부터 우리는 어떤 작품 또는 어떤 공간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감각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그것과 연관되어있는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우리가 ‘주체 내 타자성’이라고도 부르는 어떤 것이 잠재되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살아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가지는 동시에 ‘죽은 대상의 색채와 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 비로소 의미심장해지기 시작한다. 죽음, 미래, 타자성이라는 키워드는 주체가 결코 인식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대상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바로 그 자리에 소환하는 마법사의 주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

정수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2층에 전시되어 있는 <포토스라는 이름의 신(A God Named Pothos)>이라는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독립된 방 하나에 하얀 천으로 뒤덮인 다양한 가구들이 채워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스탠드에는 불이 밝혀져 있고, TV에서는 낡고 해묵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고 있다. 어떤 테이블에는 흙이 쌓여있고 또 다른 어따ᅠ간 테이블에는 뒤집힌 유리잔을 비롯한 모종의 행위가 지나간 흔적 같은 게 놓여 있기도 하다.     


여기에 찾아온 관객들은 이 방을 거닐면서 점점 뭔가의 또는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포토스라는 이름의 신>에서 부재하는 것은, 작품의 제목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포토스(Pothos)’일 것이다. ‘포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의 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나 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한 향수(鄕愁) 등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우리에게 여기에서 부재하는 신의 잔재나 흔적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일단은 당장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것은 단지 어떤 ‘사건’이거나 거주하고 있던 ‘누군가’에만 국한된다는 점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이 작품이 독립된 하나의 방에 내포되는 형식은, 동시에 이 작품이 방이라는 공간(space)을 통치성이 미치는 장소(place)로 전환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전환의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한 조각이 바로 사건 또는 인간(주체)이라는 점이다.     


작품이 현전하는 동안 지속되는 것은 ‘지금-현재 여기에는 〇〇이 부재한다.’는 문장 하나뿐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언제나 완성-의미 확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완결성이 잠재되어있는 상태, 즉 ‘〇〇’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완성되거나 아니면 ‘〇〇’이 회귀함으로써 완성될 예정으로 박제된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부재를 경험하는 관객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든 누군가가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음’이라는 의식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 공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그 관객 주체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장소를 방문하는 동안 이방인으로서 부과받을 수밖에 없는 낯섦과 불안 등의 정동을 지속적으로 생성하도록,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한 조각-‘기계장치/부품’으로서 호명되는 것이다.     


불안의 지속, 그리고 불편의 지속,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장치/부품-되기. <포토스라는 이름의 신>은 이러한 기계장치/부품-되기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평소에는 은폐되어있기 때문에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부재(不在)의 인식’을 제공한다. 요컨대 단순히 동양적 미학 개념으로서의 ‘여백’이나 ‘0’ 같은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현존’ 또는 ‘현존하는 부재’라는 골치 아픈 안건을 대뜸 우리의 눈앞에 들이미는 것이다.         



3.

사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보다는, 정수의 <나른한 죽음, 계속되는 경련>, 김희욱의 <무제>(2024, 431×188×15㎝, 나무, 에폭시 퍼티, 수성도료)와 <박제된 손>(2024, 32×40㎝, 나무, UV레진, 에폭시 퍼티, 수성 도료)의 경우가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해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두 작품이 《낮은 휘파람, 박제된 손》이라는 표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는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위치도 한낮의 더위를 피하거나 지친 다리를 달래려 쉬었다 갈 수 있는 지점에 있다. 종로나 북촌, 인사동 등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러도 좋을 법하다.





※ 이 글은 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에디터 [숲-er]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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