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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Aug 02. 2024

공연 <해금, 노마드>

‘공동기획 NUDGE(넛지)’ 프로젝트

   

        

 2024년 7월 13일에 김희수아트센터에서 <해금, 노마드>라는 제목으로 공연이 열렸다.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단체들의 창작 공연을 선보이는 ‘공동기획 NUDGE(넛지)’ 프로젝트의 두 번째 공연이다. 해금연주자인 ‘천지윤’과 한국전통음악을 재해석하는 집단 ‘TARL(탈)’의 프로듀서 겸 뮤지션인 ‘락가’의 음악을 크로스오버한 것이다.     


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01. <Dream Road>

02. 사카모토 류이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3. 김영재, 조명곡(鳥鳴曲)

04. 숲 속의 집

05. 칠리칠채

06. 해금, 노마드

07. 비트모리      


[좌] 맛놀음, [우] 향놀음, 《페스티벌 풍류도원》

        

 일단 이번 공연은 같은 날 15시에서 19시 사이에 열린 《페스티벌: 풍류도원》의 일환이다. 이 페스티벌은 ‘향놀음(향기)’, ‘맛놀음(음식)’, ‘흥놀음(공연)’의 세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한식 기반 다식· 음료를 즐기며 청량한 향기를 머금고 지금 시대의 한국전통음악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각각 후각(향놀음), 미각과 촉각(맛놀음), 그리고 시각과 청각(흥놀음)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페스티벌을 기획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풍류(風流)’라는 관념에 대한 기획자의 해석이 ‘감각’과 ‘정동’에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아쉬운 부분부터 말해보자면, 간간이 악기 소리들 사이에 조화가 깨지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 단발성 공연이다 보니 짧은 리허설만으로는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청중의 입장에서는 해금, 북, 기타 등 소리들이 여러 겹 중첩되는 와중에 어떤 한 소리만 지나치게 튀는 바람에 묻혀버리는 소리들이 생기는 순간마다 집중력이 어쩔 수 없이 깨져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보다는 좋았던 부분이 더 큰 공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해금, 노마드> 무대, 《페스티벌 풍류도원: 흥놀음》

        

 개인적으로는 공연 <해금, 노마드>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자 또는 관객들이 청각이라는 감각 요소에 매몰되기 이전에 ‘빛(시각)’이라는 감각 요소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게끔 호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번 공연은 무대 뒷편으로 여행사진작가 ‘강병무’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띄워 배경으로 차용함으로써 시각적 측면을 더한 음악 공연이었다. 하지만 사진 이미지의 활용보다도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공연의 시작에 앞서 숲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무대를 다수의 탁상등(스탠드조명)으로 밝혀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왜냐면 어슴푸레하게 발광하는 전등은 어디까지나 ‘빛’이라는 오브제를 무대 위로 시각화하는 장치로서 배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해금, 노마드>가 ‘시각과 청각의 결합’이라는 감각적 측면을 중시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풍류도원》의 각 프로그램들이 인간의 오감(五感)을 다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다.     


 이 공연에서 인상적이었던 다른 하나는 ‘해금(奚琴)’이라는 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주자 ‘천지윤’은 무대를 통해 해금을 몽골의 ‘해’ 부족 전통악기가 전래된 것이라고 소개한다. (좀더 정확하게는 ‘해(奚)’족은 동호(東胡)의 한 갈래로,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이동할 당시에 함께 섞여서 유입된 해족 유민들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역사만 놓고 본다면 ‘해금’은 드넓은 하늘 아래 펼쳐진 유목민의 정서를 담고 있는 악기일 것이다. 그런데 고려 시기부터 이미 ‘당악기’에 대조되는 개념인 ‘향악기(고유악기)’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은, 해금이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고유의 악곡에도 정말 잘 어울리는 바람에 금세 토착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해금’이 유목민의 정서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주민의 정서까지도 담아내는 악기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역사보다도 개인적으로 느낀 해금의 가장 큰 매력은 다름 아닌 ‘지판이 없다’는 특징이었다. 지판이 없다는 것은 연주자가 악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떤 음정을 표현해낼 때 고정된 지표 없이 오직 연주자의 신체와 감각을 통해서만 그 음정에 최대한 접근해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기호나 텍스트로 어떤 사건의 출현을 예정하는) 어떤 악보가 연주자 앞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해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생성되는 음악은 철저하게 오직 연주자 본인으로부터만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악보가 연주자의 해석을 통해 변형-생성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악보(기호 텍스트)에 내재하는 문법들, 이를테면 조성, 박자, 빠르기, 장르, 스타일 등과 같은 규칙이나 규범들에 의해 그어진 경계 내에서만 허용되는 자유, 어떤 영토 내에서만 허용되는 자유인 것이다. 반면 해금의 ‘지판 없음’이라는 요소는 연주자에게 한없이 자유롭게 조성과 음계를 표현해낼 여지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특히 해금이 독주될 때 더욱 분명해질 이러한 탈영토성은, 해금이 다른 모든 악기에 대해 대조적으로 가지는 개별성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 이 글은 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에디터 [숲-er]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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