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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Aug 06. 2024

공연 <민족의 노래>

조금은 답답했던 공연

      

그레이 바이 실버, 《민족의 노래》, 김희수아트센터, 20240722.


 2024년 7월 20일 김희수아트센터에서 민족음악 기반 재즈를 표방하는 그룹 ‘그레이 바이 실버(Gray by Silver)’의 《민족의 노래(THE SONG OF ETHNIC)》 공연이 열렸다. ‘민족의 노래’는 그레이 바이 실버의 2집 앨범 제목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에서는 1집과 2집에서 선정한 곡들과 함께 향후 발매될 3집 수록곡 일부도 무대에 올려졌다.              


 ‘그레이 바이 실버’는 각각의 연주자들이 상당히 안정적인 연주 실력을 가진 연주자들이 모인 그룹이었다. 한국 전통음악에 기반함을 표방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한국 전통음악적 요소를 차용한 점도 눈에 띈다. 기본적으로는 한국 전통 리듬에 아름다운 선율을 얹어내는 스타일인데, 곡에 따라서는 고요하면서 몽환적일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고자 하는 등 표현하려는 주제에 따른 스케일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듯하다.     


 그레이 바이 실버의 이번 공연을 보면서 아쉬운 점 세 가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째는 이 그룹이 이번처럼 ‘민족’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인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자인 ‘이한빈’은 자기들에게 있는 한국 음악가의 고유한 예술성을 나타내기 위해 ‘민족’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인데 그로 인해 정치성 등 관련 없는 질문들을 받게 되어서 곤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 오히려 작곡가 스스로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놓여있는 맥락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해 보충적 의미로 적어놓은 영어 단어가 ‘Ethnic’이라는 점은, 다른 문화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Ethnic”은 어원적으로 ‘(우리가 아닌) 이교도인/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금도 ‘비(非)유럽인/ 비(費)기독교인/ 비(非)백인’이라는 의미소를 내포하는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의 노래’를 ‘The Song of Ethnic’이라고 표기하는 순간, ‘그레이 바이 실버’는 대항해시대 이후 출현한 제국주의가 ‘낯설고 기괴한 야만인(Savages)’의 언어와 습속을 유럽인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발명하고 고안한 ‘민족학(Ethnology)’의 입장 안에서 활동 중이라고 고백하는 꼴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라면 아마도 이들의 음악은 오히려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욱 호평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이 미국과 유럽의 그들이 상상하는 ‘한국의 Ethnic’, 보거나 듣고 싶어 하는 ‘한국의 Ethnic’을 재현한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레이 바이 실버, 《민족의 노래》, 김희수아트센터, 20240722. ⓒ수림문화재단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피아노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비대해서, 앙상블은 금이 가서 깨지기 직전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피아노가 홀로 광야를 질주하면, 나머지가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퍼커션이나 대금이 내는 모든 소리에, 그리고 보컬의 모든 언어뿐만 아니라 작은 호흡 하나하나에도, 피아노는 언제나 반드시 간섭하면서 다른 파트 위에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작곡자가 뭔가를 전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굉장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은 든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결과물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담아내지 못한 것처럼도 느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나머지 소리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만약 그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항상 공연 첫 순서로 <다스름>을 넣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에서 ‘조화’와 ‘상생’은 가장 중요한 가치여야만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차라리 이번 무대가 피아노 솔로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빙하 (출처: Pixabay, ⓒValentina Zotova)

    

 공연을 보면서 들었던 세 번째 생각은 표현하려는 주제가 너무 거대한 관념을 직접 보여주려 하는 바람에 오히려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해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이야(AYIYA)>를 놓고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연주에 앞서 ‘이한빈’은 곡을 소개하면서, 인적이 없는 아이슬란드 대자연 속에서 흐르는 물에 떠내려오는 빙하를 보면서 얻은 영감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아마도 추측해보자면 그것은 어떠한 사진이나 그림의 프레임에도 담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문자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그래서 정말이지 숭고하면서도 경이롭기까지 한 무한의 찰나를 체험하는 순간의 유한한 지속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한빈의 설명대로라면 이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말이나 문자와 같은 기호에 포착되기 이전 단계에서 대자연 그 자체를 감각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순수와 경이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자연(어머니)과 빙하(아이) 사이의 관계로부터 불현듯 찾아온 ‘모성(母性)의 본질’에 관한 일종의 깨달음 또는 영감이다. 그렇다면 <아이야>에는 혼돈과 조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운동)하는 (간혹 우리가 진리라고도 부르는) 법(法)이 담겨 있을 것이고, 인간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도 부분적으로라도 녹아들어 있을 것이며, (인간의 감각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나타나는 ‘숭고’와 같은 개념을 경유하면서) 무한성과 신적 존재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에 하는 난제의 실마리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적어도 나는 아직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그 질문들조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총평해보자면, 공연을 보면서 조금은 답답했다. 충분히 재능 넘치고 실력 좋은 젊은 음악가 그룹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각각의 파트가 내는 소리는 하나같이 충분히 아름다웠고 또한 저마다의 고유한 울림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앙상블은 여기저기 깨져 조각나 있었다. 또 음악을 통해 전달하려는 정동이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이었으며 여기에 거대한 관념을 표현해내는 걸 시도하고 있기까지 해서, 결국에는 음악이 끝난 후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들고야 말았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음악적 영감을 찾아 헤매는 진심의 크기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정의 온도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는 점이다. 추구하는 음악성이나 철학 등에서 크기보다는 깊이를 더해가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다음 작업을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에디터 [숲-er]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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