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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Feb 11. 2016

도착한 그 밤

2012. 라오스 ::: 비엔티엔(위앙짠)

#1. 도착한 그 밤-미니고래


 공항에서 내린 이방인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달라진 공기이다. 숨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의 어색한 맛과 독특한 향기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낯선 상황과 공간, 심지어 시간마저도 낯설게 느끼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처음 그곳을 찾은 이방인이 느끼는 당혹감은 약간의 두려움과도 닮아있다. 캄캄한 밤 비엔티엔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약간의 피로와 허기를 안고 입국심사를 마친 후 환전을 했다. 그는 익숙하게 환전을 하는 그녀를 뒤에서 그것을 구경한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선 그이기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뒤를 쫓기만 하는 것이다. 환전을 마친 그들은 택시를 타고 비엔티엔 시내로 향했다.


“오빠가 말해봐.”

“뭐를?”

“아무 거나 말해봐. 영어 할 줄 알잖아.”

“그… 에… 갑자기 말하라 하니까 못 하겠어.”

“아무 거나 말해봐. 안되겠어. 앞으로도 오빠한테 자주 말 시켜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또 장난기로 촉촉해져 있다.


“보통은 돌아다니면서 숙소를 잡는 게 좋은데, 오늘은 늦은 시간에 도착하기도 하고 해서 미리 예약해둔 거야.”

“하긴 비도 오고 깜깜한데 숙소 잡으려도 돌아다니는 것도 고생이겠네. 게다가 만약에 빈 방 없어서 돌아다녀야 하면 큰일이잖아.”


 우기(雨期)인 9월의 라오스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그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 또 햇살이 지면을 뚫고 내려박힐 듯 맑아졌다가 다시 흐려지고는 한다. 특히 해가 지고 나서는 부슬비와 폭우가 번갈아 내린다.그들이 예약한 숙소는 작은 호텔의 맨 위층이었다. 


“어떻게 할까? 나가서 밥을 먹을까, 아니면 편의점에서 뭘 사다가 숙소에서 먹을까?”


 이미 라오스가 두 번째인 그녀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음색으로 그에게 물었다.






#2. 도착한 그 밤-고래군


“일단 나가자. 뭘 먹든 밖에 나가야 하니까.”

“네에~”


 나는 그녀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배가 고프니까.낯설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지 않은, 아니 만나본 적이 없는 대상에 대한 그 느낌이 한없이 커다란 세상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 사람은 그 안에서 오히려 익숙한 뭔가를 찾아내고자 애쓰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도 편의점이 24시간 하는 거야?”

“잘 모르겠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그냥 알고 있을 줄 알고.”

“예전엔 못 봤는데, 아까 택시 타고 오면서 보니까 편의점이 있더라고. 물어보라니까?”


 또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아찔한 느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지금 이곳을 여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곳을 여행하는 나를 구경하는 것일까?


“어어! 오빠 입 튀어나온다! 뭐가 불만이야!”

“아니 불만은 무슨…”


 장난기 가득할 때의 그녀를 이길 방법은 지금의 내게는 없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정도일 뿐. 우리는 우선 식당에서 밥을 먹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가게가 저기밖에 없는데, 괜찮겠어?”

“비싸 보이는데, 괜찮을까?”

“비싸봤자 한국보다는 안 비싸. 걱정 안 해도 돼.”


 우리는 마르게리따와 맥주를 주문했다. 한국에 있을 때 그녀가 여행에서 돌아오며 가져다 주며 처음 맛보았던 ‘비어라오’는 내가 마셔본 맥주 중에서도 손꼽히는 괜찮은 맥주이다. 한 장소의 정체성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 장소를 잠깐 지나치는 여행자들에게 공간의 기억은 향기나 소리, 감촉과 맛과 같은 감각의 흔적을 통해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굶주린 여행자와 맥주의 관계는 각별하다. 특히 한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라의 고유한 맥주는 거의 항상 맛있는데, 라오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어라오’는 내게 꽤 맛있는 맥주에서 지금 이 순간 기억의 흔적으로 변했다.


 투툭투툭 소리를 내는 비와 까만 밤, 우리 뒤편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두 쌍의 남녀가 나름 조용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고(프랑스어는 결코 고요한 언어가 아니다.), 피자는 맛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 맥주와 이 장소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끈적거리는 공기는 이제 촉촉하게 느껴지고, 낯선 공기 내음은 이제 기분 좋은 향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순간까지만 해도 8만낍(약 12,000원) 이라는 가격이 정말 저렴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3. 도착한 그 밤-미니양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느긋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약간 오른 비어라오의 취기 때문에 기분은 좋기만 했다. 산책삼아 근처를 좀 돌아볼까 했지만 불빛 하나 없는 거리였기에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서울이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거리의 모습. 난 그런 라오스의 모습이 좋았다.거리를 배회하던 우리는 미리 봐놨던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전 라오스 여행에서는 루앙프라방에만 있었기 때문에 라오스에 편의점이 있다는 사실이 나도 신기했다.  마치 방콕에 와 있는 기분. 이것이 라오스 제 1 도시의 위엄인 것인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며 나는 고래군을 힐끔 쳐다보았다.한국과 별다를 것 없는 편의점이었지만 얼굴 가득 신남이 묻어있는 고래군을 보며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숙소에 돌아가서 먹을 비어라오와 간단한 안주들을 샀다. 


“나 담배피고 갈래.”

“숙소 앞에 가서 펴.”

“싫어. 여기서 필래.”

“왜 굳이 여기서 핀다는 건데?”

“그냥 여기가 좋아.”


 굳이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겠다는 고래군. 할 수 없이 나는 옆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편의점 처마 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는 고래군. 나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왜 여기서 담배를 피고 싶어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오빠, 좋아?”

“응.”

“뭐가 좋아?”

“그냥 좋아.”

“바보. 이제 가자.”


 좋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숙소로 향한 우리는 라오스 첫 날을 비어라오와 함께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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