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인천 / 도쿄 / 취리히
#0. 유럽 어디 가보고 싶어?- 미니양이 고래군에게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어디 가보고 싶어요?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나라 있어?”
잠시 고민해봤지만, 사실 절실하게 가보고 싶은 곳은 없다. 어쩌면 낯선 곳이면 어디든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멀고 막연한 지역이라서 일상 속에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이 배제해왔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보고 싶은 데 없어. 당신이 알아서 정해.’ 따위의 대답을 했다가는 높은 확률로 그녀에게 혼나버리고 말 것을 이제 나는 잘 알고 있다.
“으음, 동유럽 쪽이랑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터키!”
“이유는?”
“터키는 뭐랄까… 막연하게 예전부터 살면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장소라는 느낌이었어. 동유럽은 한국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이잖아.
그래서 가보고 싶어. 스페인이랑 포르투갈은 당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좋은 곳인지 직접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2014년이 거의 저물어가는 시점에 고래군은 미니양의 손을 잡고 떠난다.
#1. 잠시 도쿄- 고래군
“우선 도쿄에서 하루 자야 해. 경유하는 비행편이 도쿄 도착한 다음 날 오후 스케쥴이라 어쩔 수가 없어. 그런데 오빠 도쿄는 가본 적 없지?”
“응, 홋카이도랑 나고야, 교토랑 오사카만 가봤지. 그런데 뭐 다르려나?”
“다르다면 다르고, 뭐 그래봤자 일본이라는 느낌은 같기는 해요.”
우리가 선택한 항공사는 스위스에어라인. 그런데 취리히를 경유시키는 이 항공사는 인천공항에 연결된 비행편이 없단다. 덕분에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일본에 하루 머물게 되었다. 그나저나 올 해 2014년이 지나고 나면 한국에서는 담배 가격을 큰 폭으로 인상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정말 대중교통비를 제외하면 일본이 한국보다 물가가 싼 나라가 되는 셈이다. 임금은 훨씬 적고 말이지. 말 그대로 점점 살기 팍팍해져만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무튼 인천에서 우리를 태운 것은 JAL이다. 땅콩 덕분에 애써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을 아시아나와 그것을 신경 쓰느라 평소보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대한항공을 기대했지만, 그래도 JAL 역시 처음 타보는 항공사라 이것저것 기대가 된다.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쨌든 ‘처음’이잖아. 원래 ‘처음’은 항상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법이니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을 여행하는 것은 이제 두려움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고, 그리고 동시에 설레임도 옅어져 있다. 마치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나리타 공항에 내리고, 전철을 타고, 숙소 근처에서 내려 미리 예약한 숙소까지 걷는다. 짐을 풀고는 함께 걷는다. 그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2. 다른 세상으로- 고래군
어제 밤에는 과식을 해버렸다. 아무래도 일본 음식이 입에 맞는 편이라서 그랬나보다. 인천에서 무거운 배낭은 부쳐버렸고, 등에는 가벼운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있다.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강을 따라 다시 전철역으로 걷는다. 어제를 되감기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전철에 몸을 싣기 위해 땅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땅 위로 힘겹게 기어오르니,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내 앞에 펼쳐진다. 바로 공항이다. 문득 그녀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오빠! 그런데 우리 예약 확인증에 좌석 번호가 없어! 좌석 지정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사실 ICN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 떨어져 앉아 왔더랬다. 비행시간이 긴 것도 아니고, 어차피 피곤함에 잠들 것이기도 했기에 그러려니 하며 타고 왔다. 그런데 나리타에서 취리히까지는 하룻밤을 꼬박 날아가야 한다. 만약 떨어져 앉기라도 한다면, 긴 비행시간이 더욱 길게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체크인을 하며 받은 티켓에는 좌석번호가 기재되어있지 않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고 카운터에 물어보니, 게이트에 가서 물어보란다. 게이트 카운터까지 털레털레 걸어 도착하니 그녀가 내게 말한다.
“오빠가 가서 물어봐요.”
여행 베테랑인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할 때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밖에 없다. 나를 훈련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할 때가 아니면 본인이 귀찮을 때. 뭐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작용하고 있고, 후자 쪽이 더 강한 동력인 것 같….
#3. 이제 출발합니다 - 미니양
정신없는 12월을 보내고, 드디어 출국 날. 사실 떠나기 직전까지 일들이 많았어서 여행을 가는 것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공항에 가서야 ‘아, 이제 가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공항에는 출국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우선 도쿄. 일본항공 카운터에는 일본이 목적지인 사람들과 우리처럼 경유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꽤나 긴 줄을 서야만 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보딩패스를 받고 나니, 이미 빠듯한 출발시간.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기다리다보니 2시간은 훌쩍 지나버렸다.
출국심사를 마친 우리는 출발시간에 맞추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제 시간에 수속을 해주지 못한 항공사 측은 출발시간을 미뤘다. 승객이 많으면 카운터를 좀 일찍 열어 수속을 하면 안되려나? 승객들은 일찌감치 와서도 카운터가 열리지 않아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요근래 인천공항을 이용할 때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인천공항 이용객은 점점 늘어나는데, 그에 따른 대응은 몇 년째 제자리 걸음인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 첫 번째 경유지인 도쿄로 출발! 하지만 우리는 따로 떨어져 가야 하는 신세였다. 붙은 좌석이 없단다. 결국 신혼여행 출발은 각자 앉아 가야 했다. 옆에 앉은 승객에게 바꿔달라고 해도 됐을 것 같지만, 2시간 40분쯤 떨어져 간다해도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도쿄-취리히 구간도 떨어져갈 위기에 놓였었다.
"오빠! 우리 취리히까지 또 떨어져 앉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인천에서 도쿄는 가까우니까 괜찮은데, 취리히까지 떨어져 앉아 가는건 좀 싫은데....."
"응. 나도 같이 앉아 가고 싶어."
"그러면 오빠가 항공사 직원한테 한 번 얘기해줘요. 우리 신혼여행이니까 같이 앉아가게 해달라고."
"응? 내가?"
"응! 오빠가!"
"당신이 하면 안돼요?"
"오빠가 해줘요. 오빠가 해줘요. 오빠가 해줘요. 오빠가 해줘요. 오빠가 해줘요. 오빠가 해줘요. 응?"
그래서 고래군에게 미리 얘기해달라고 했다. 우리가 신혼여행이니 붙어 앉아 갔으면 좋겠다고, 배려해달라고. 고래군은 밍기적 밍기적 가기 싫어했지만, 난 오빠가 해주길 바랐다. 왜냐하면 내가 여행 경험이 많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내게 의지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래군의 활약(?) 덕분에 우리는 비행기 가장 뒷좌석에 나란히 붙어 앉아갈 수 있었다. 10시간이 넘은 비행 끝에 드디어 취리히 도착. 하지만 최종목적지인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서는 하루의 시간을 더 지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