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스위스 ::: 취리히
#1. 첫 느낌이란 건, 낯선 자의 이질감- 고래군
공항터미널 출입구 앞 재떨이에 불이라도 났는지 하얀 연기가 폭발 직전의 분화구처럼 솟아오른다.
“오빠, 유럽의 첫인상이 어때요?”
“첫인상?”
“응. 지금 여기가 처음 만나는 유럽이잖아요.”
“그렇죠. 맞네요.”
첫인상이라고? 착륙 직전에 높은 하늘에서 바라본, 저녁햇살에 빛나는 알프스? 아니, 그보다는 서울에서 보던 빛에 물든 다색(多色)의 밤하늘과는 다르게 조금 더 짙고 깊은 밤색(night color) 하늘이라든가, 아니면 공항건물 안쪽까지 스며드는 짙은 담배내음 섞인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의 느낌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비(非)유럽인이 유럽을 마주할 때 느껴야만 하는 주눅’이나 ‘높은 물가에 지레 겁먹은 움츠러듬’과 같은 걱정을 위장한 공포와 같은 답이 오히려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뭔 소리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고요.
대신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취리히 공항 입구에서 핫도그 파는 아저씨, 반호프까지 가는 방법을 아주 잘 설명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도 나중에 한국에서 길 묻는 외국인에게 꼭 친절하게 길을 알려줄게요.
오늘 내일을 보낼 만큼만 스위스 프랑을 조금 환전한 우리는 이윽고 기차티켓을 사들고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와아! 기차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좌석은 넓고, 심지어 깨끗하기까지 하다. 기차를 타고 공항에서 취리히 중앙역까지 가서 내렸더니, 이제 숙소만 찾아가면 된다는 생각에 갑작스레 허기가 느껴진다. 그나저나 여기 사람들 뭔 담배를 이리 피워대나 모르겠다. 여기 담배 엄청 비싼 거 아니었나? 그만큼 벌어서 상관없으려나? 잘 모르겠네.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동시에 말을 건넸다.
“배고파!”
갑자기 엄습한 허기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어디선가 고기와 채소를 볶는 고소한 향기가 우리를 둘러싸버렸기 때문이다. 향기에 질질 끌려 도착한 곳에는 터키에서 온 게 분명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케밥과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파는 좌판이 있었다.
‘아, 우리 내일 터키로 갈 건데…’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은 ‘저 녀석 마음에 안 들어.’였다. 그녀에게 뭐 저리 껄떡거리는 걸까? 슬슬 분노게이지가 차오른다. 그런 내 눈치를 알아챘는지, 가만히 그녀가 내 손을 붙들며 이야기한다.
“원래 유럽 오면 동양여자한테 좀 치근덕거려요. 대체로 나쁜 뜻은 아니니까 오빠가 참아.”
문화 차이인 걸까? 이제 막 경계를 넘어왔기 때문에, 단지 낯설기 때문에 내가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인 걸까? 어쩌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질감은 지금-여기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저나 샌드위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네.
#2. 유럽에서의 첫 밤을 맞이하는 자세- 고래군
그녀의 손을 꼬옥 붙들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미리 스마트폰에 저장해둔 지도를 꺼내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내게 주의를 준다.
“오빠, 가급적이면 전화기 자꾸 꺼내지 마요.” (미니양 曰 "숙소가 조금 으슥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왜? 나 아이폰 4라서 괜찮지 않을까? 얼마나 오래 된 모델인데요.”
“외국에서 아이폰은 지갑만큼이나 조심해야 해요.”
“오래 된 모델인데?”
“얘네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1, 2년 쓰고 전화기 바꾸는 줄 알아?”
그럴 수도 있겠네.
어두운 밤에 낯선 곳에 도착하면, 숙소를 찾아가는 것이 큰일이다. (물론 지나치게 밝은 서울에 익숙해져버린 내가 이상한 것이고, 지구의 대부분 지역은 밤을 제법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진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길을 찾아 헤매는 것도 아무래도 좀 더 위험한 일이 되어버리고, 더군다나 길을 물어볼 행인도 뜸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여행 베테랑인 그녀의 설명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암기할 정도로 지도를 여러 번 들여다 본 덕분에 헤매지 않고 호텔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유럽에서 보내는 오빠의 첫 번째 숙소입니다아.”
마지막을 길게 늘어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비로소 안전하게 도착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짐을 풀고 있자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독백하듯 말한다.
“내일 이스탄불에서 서두르지 않으면 숙소 도착하기 전에 해 질까봐 걱정이야.”
“별 걱정을 다 한다. 오늘처럼 지도 보면서 찾아가면 되지.”
“여기는 지도가 정확하게 나와 있어서 그런 거지. 사실 이렇게 정확할 줄 몰랐어.”
“안 정확한 지도도 있나?”
“오래된 도시는 미로같이 길이 복잡한데다가, 심지어는 지도가 틀리기도 하거든.”
잘못된 지도를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사실 그녀의 걱정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지 않은 지도라고? 중세도 아닌 지금 세상에?
“오빠! 우리 나가자!”
“응? 지금 이 시간에요? 늦은 밤이잖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늦은… 어라?”
시계를 본 나는 살짝 당황했다. 체감하기로는 밤 열 한두 시쯤 된 것 같았는데, 시계는 겨우(?) 일곱 시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시차가 달라지면서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이다.
유럽에서 첫 밤을 맞이하는 가장 적합한 자세인 ‘침대에 눕힌 몸’은 일단 그대로 두고, 눈을 감고 가만히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 여행을 왔다고! 나는 지금 막 여행을 시작했다고!’ 그렇게 지쳐 누워버린 몸 속 깊은 곳에서 한줄기 기운을 끌어올리는 주문을 외우고 나서, 나는 몸을 힘차게 일으키려다 우선은 뒤집어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안 피곤해?”
#3. 취리히를 걷자- 미니양
2008년 첫 유럽여행때 루체른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둘러보았던 취리히. 이번에도 잠시나마 들러가게 되어서 반가웠다. 비싼 스위스 물가 덕분에 숙소는 어두컴컴한 동네였지만 그렇다고 취리히에서의 저녁시간을 숙소에 쳐박혀 보내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취리히 공항 교통권도 24시간권으로 끊은 김에 나가보기로 했다.
고래군의 첫 유럽도시.
나의 첫 유럽여행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우리와는 생판 다른 색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고래군은 어딘가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와 반대로 취리히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북적거림과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우리가 취리히에 도착한 날은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여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캐롤을 부르기도 하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채 걷기도 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모두 즐거워보였다. 그런 분위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즐거워졌다.
우리는 무작정 트램을 잡아타고 가보기도 하고, 불켜진 성당과 호수를 둘러보기도 했다.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유럽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느껴보고, 취리히의 곳곳을 걸어보며 유럽에서의 첫 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