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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Apr 12. 2016

혼자만의 시간

2014. 스위스 ::: 취리히

#1. 투명한 겨울- 고래군 


 가만히 눈을 떴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선 덕분에 흔들림을 감추지 못하는 유리창이 내는 덜컹덜컹 소리가 그녀와 나의 숨소리 사이로 끼어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고 보니 물을 따로 사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수돗물이라도 마셔야겠다. 마셔도 되나? 산동네(?)인데 괜찮지 않을까? 한국이랑 일본은 그냥 마셔도 괜찮은데…


 여전히 침대에서 못 벗어난 대신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켜고 ‘스위스 취리히 수돗물’을 검색해본다. 내 손바닥처럼 작은 직사각형의 화면이 내게 답을 한다. ‘천연암반수니까 그냥 드세요. 그 동네 사람들도 그냥 수돗물 마셔요.’ 뭐 정말 암반수인지 뭔지 알 게 뭐야. 괜찮다니까 괜찮겠지. 그러고 보면 나도 어느새 유포된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정말 괜찮을지 아닐지 따위의 고민은 이제는 귀찮은 걸 보면 말이다.

 행위는 필연적으로 소리를 만든다. 그것이 아름다운 화음이든, 아니면 그저 그런 잡음에 불과하든지 말이야. 세면대에서 물을 마시는 나에게서 비롯되는 그 소리들이 그녀를 잠으로부터 끌어낸 모양이다.


 “오빠 지금 몇 시야?”

 “일어났어요? 나 시계는 아직 안 봤어. 그런데 오늘 어디 가자고 했지?”


 지난 밤 잠들기 전, 그녀는 취리히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했다. 어차피 24시간 교통권도 외투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니,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나는 무작정 가자고 했다.


 작은 가방을 하나씩 둘러맨 우리는 성냥갑처럼 생긴 숙소 건물로부터 벗어나 길 위로 나섰다. 낯선 도시의 모습이 의외로 차갑지만은 않다. 지난 밤 암흑 속에 도사린 이 동네의 적막함에 대해 오해였다고 변명이라도 하듯, 건너편 건물 창문가에는 몇몇 사람들이 살아 움직인다. 하늘은 맑고 맑은데다가, 심지어 바람도 산뜻하다. 팔짱을 낀 커플이 지나가며 우리를 신기하게 훔쳐본다. 무엇보다도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빵과 치즈 냄새다. 음식 냄새 속에서 느껴지는 불의 따스함이, 밤새 얼어붙은 동네를 녹여주는 것만 같다.


 “도대체 지난밤의 그 동네가 맞아 여기? 어젯밤하고 왜 이리 달라?”

 “오빠는 대도시의 밤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서 그래. 음, 여기도 대도시는 대도시지만, 뭐라고 해야 되지? 서울이나 삿포로나 도쿄나 그런 도시랑은 다른 대도시거든. 말 해놓고 보니 이상하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메트로폴리스는 아니라는 거지 뭐.”

 “아무튼 그런 도시에서만 살아봐서 그런 거에요. 사실 조금만 벗어나면 밤이 얼마나 어두운데.”


 결국 내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는 뜻이구나.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도 나를 응시하는 것처럼, 내가 느끼는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실은 이상한 거야. 아마도.

 그나저나 이 동네는 주차된 차는 물론이고 택시마저도 메르세데스 아니면 BMW네. 가끔 피아트도 보이고, 토요타도 드문드문 보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바보같은 말을 건넸다.


“이 동네 외제차 겁나 많네.”







#2. 혼자만의 시간 - 고래군


 그녀가 꼭 가보고 싶다는 몇몇 군데는 취리히 호수와 디자인 뮤지엄, 취리히 미술관 등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곳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숨 가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쉬엄쉬엄 걷는 게 우리에게는 더욱 어울린다. 그래서 숙소에서부터 디자인 뮤지엄까지 우리는 걸어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오게 되면 가보지 뭐.’ 하면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이 도시가 조금 더 보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과 그 안에 갇혀 어딘가로 끌려가는 운전자들. 여러 가닥의 열차들이 서 있는 차량 기지와 그보다 더 여러 가닥의 선로들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걸어 건너며 보이는 햇살에 반짝이는 빌딩들과 낮게 펼쳐진 건물들. 그리고 고가도로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니, 우리 앞을 가로지르는 길 건너편으로 디자인 뮤지엄이 보인다.


 정확한 이름은 ‘Museum für Gestaltung’으로, 원래 자리는 이곳이 아닌데 공사하느라 잠시 여기에 와 있다나? 여기가 어디냐고?  ‘Department 어쩌고’ 등의 팻말이 달려있는 것을 보니, 대학교인가보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취리히 응용과학대학교, 사회복지학부 Zürcher Hochschule für Angewandte Wissenschaften, Departement Soziale Arbeit’ 건물이었다.) 산뜻한 디자인의 이 학교건물 한구석에 우리가 찾던 박물관이 있었다.


“오빠. 우리 돈 모자라.”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내게 말한다.


 “모자라? 카드로 할까? 얼마나 모자란데?”

 “한 명 입장료밖에 안 돼요. 카드로 하면 스위스프랑이 애매하게 남을 거 같아. 어쩌지?”

 “아 그래요? 그럼 당신 혼자 다녀와. 어차피 당신이 보고 싶었던 거잖아.”

 “그래도… 나도 안 볼래. 그냥 우리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자.”

 “안 돼! 그럼 여기까지 뭐 하러 왔냐 우리? 차라리 호수 보러 갔지 그럼. 어서 다녀와. 나 여기 앉아 있을게. 어서. 어서.”


 미안함에 울상을 짓는 그녀의 등을 떠밀고 또 떠밀어 카운터에서 티켓을 사고는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건물 로비에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긴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 중 하나에 주저앉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내 몸 바깥의 소리가 평소보다 작게, 그리고 작은 소리는 더 작게 들린다. 그리고 대신 나의 소리, 이를테면 숨을 마시고 뱉는 소리라든가 침을 삼키는 소리와 같은 것들이 더 잘 들린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를 기다린다.  






#3. 혼자봐서 미안해 - 미니양 


 우리에게 남은 돈 10프랑. 혼자 들어가서 전시를 본다는 것이 고래군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그 돈이면 다시 환전해서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시를 보지 않고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낸 후에 공항으로 이동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업이 디자이너인데 스위스까지 와서 뮤지엄 한 군데는 봐야 하지 않겠냐는 고래군의 설득(?)으로 외롭지만 혼자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내가 갔을 때는 ‘스위스 디자인 100년’ 이런 느낌의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자인 작품들이 쭉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제품 디자인이 많았으나, 한 쪽에는 디자인 관련 책들도 함께 비치되어 있어서 꽤나 유익했고, 전시장에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조용하게 전시장 전세 낸 기분으로 집중해서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밖에서 기다릴 고래군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와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고래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작품들 사진도 찍어가며 열심히(?) 보고 전시장을 나왔다. 전시장을 나와 두리번거리며 고래군을 찾아보니, 정말 편안해 보이는, 앉아서 작업하면 정말 잘될 것 같이 생긴 책상과 의자에 고래군이 얌전히 앉아있다. 


“오빠! 나 왔어!”

“잘 봤어요?”

“응! 오빠랑 같이 들어갔으면 좋았을껄.”

“아니야. 당신이 잘 봤으면 됐지, 뭐.”

“다음번에 오면 손잡고 같이 보자.”

“그래요.”


 우리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전시장 밖에는 차 마시며 멍하게 앉아있고 싶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지만,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이스탄불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공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이런 곳에서 작업하면 왠지 잘 될 것 같은 느낌 :::






#4.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고래군 


 크리스마스를 앞둔 까닭인지 어딘지 모르게 들뜬 사람들이 거리를 걷는 동안 우리는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되돌아간다. 어제도 느낀 것이지만, 기차가 참 좋다. 그녀에게 기차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중에 독일에 들르게 되면 똑같은 구조의 기차를 타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건너와, 이제 여기를 숨쉬는 일이 조금씩 편안해지려는 시점에 곧바로 떠나려니 아쉬움만 가득 남겨둔 느낌이다. 지금이야 일정도, 주머니 사정도 허락하지 않으니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올 테다.’ 하는 기약 없는 다짐만 할 수밖에….


 그나저나 이제 만나기로 한 ‘터키’는 어떤 동네일까? 사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는 ‘아스팔트가 깔린 길 옆 가게에서 케밥을 파는 터키 아저씨’…는 사실 한국인데 말이지. 활주로에서 바퀴를 떼어낸 비행기 안에서 아쉬움을 두근거리는 기대 뒤에 잠시 접어 넣고 있으려니, 문득 그녀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가면 뭐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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