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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y 15. 2016

한 겨울 밤의 길찾기_이스탄불 #1

2014. 터키 ::: 이스탄불

#1. 숭고에 관하여- 고래군 


 착륙 30분 전이라는 기장 아저씨의 목소리가 기내를 슬며시 훑고 지나간다. 취리히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는 하늘길에서 그녀는 주먹을 꼭 쥐며 내게 말을 건넸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기분이 어때요?”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기장아저씨 운전 부드럽게 잘 하시네.”

 “뭐야 그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치한 내 농담에 웃어주는 것을 보면 그녀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마주보며 잠시 미소를 주고받던 나는, 이윽고 유리창에 코를 갖다 대고는 바깥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 한동안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며 남긴 노을이 안개처럼 지면에 내려앉은 이스탄불의 장대한 풍경이 사고의 흐름을 툭 끊어버린 것이다. 에게해(Aegean Sea)와 흑해(Black Sea)가 한 눈에 보이는 높이에서 굽어보는 거대도시의 이국성에 감탄이 입술을 헤집고 나와 버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뭐지? 감동? 아니다 이건… 그래. ‘숭고’였구나. 이성은 고요히 침묵하지만, 그 배후에서는 ‘최초의 동양(Orient)’, ‘페르시아와 오스만의 찬란한 시대’ 등등의 헌사가 스쳐 지나면서 영혼에, 내면에 각인되는 순간은 아마도 ‘숭고’가 맞을 것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라는 숭고의 의미가 절실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면서 한 생각은 우습게도 ‘빛이 입자라더니 정말인가보네.’ 하는 것이었다. 노을이 뿌옇게 지면을 덮고 있는 모습이 빛이 스스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빛이 질량이 있던가? 없던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나의, 우리의 이번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바로 지금-여기에서부터.










#2. 아타튀르크- 고래군 


 나는 탈것에서 내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지상의 공기를 처음 호흡할 때 몸속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충분하고도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간의 향기를 더듬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왔다!”


 처음 들이마신 숨을 토해내면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곳’에서 실체를 부여받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 다음에야 빛과 소리,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사람과 사물을 보기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항이야말로 한 도시의, 그리고 한 나라의 첫인상이자 마지막 기억이 되기 마련이겠구나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항에서 무엇을 첫인상을 평가하게 되는 것일까? 깔끔하고 편리한 시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친절한 서비스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공항 냄새에서 첫인상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뀌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지.)


 아타튀르크 공항의 향기는 약간의 습기와 몇 가지 향신료 냄새, 그리고 땀 내음 섞인 사람 냄새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첫 향기라는 것이 시(詩)와 비슷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언어에 담아내는 것이 시인(詩人)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시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표현을 잘 찾아낼 수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스탄불에서부터 이번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말은 우리의 두 어깨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인천에서 수하물로 보냈던 무거운 여행배낭이 이스탄불에서부터 비로소 우리와 동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어깨를 짓누르는 이 무게에 익숙해지려면 이번 여행에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게 될까?


 터키 리라를 조금 환전한 우리는 공항에서 지하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니, 바로 앞에 커다란 슈퍼마켓이 나타났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진다. 나는 그녀를 멈춰 세운 다음 하소연했다.


 “나 목 마르다! 물이라도 사 마시자!”

 “응. 그러면 오빠 혼자 들어가서 사와요. 우리 짐 많으니까, 나는 밖에서 기다릴게. 빨리 다녀와요.”


 터키 리라 환율이 얼마나 되더라? 가게는 꽤나 넓었다. 나는 천천히 둘러보며 대략의 물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많은 종류의 과자들이 있고, 냉장고에는 음료수와 물이 채워져 있다. 반면 가게를 한 바퀴 돌 동안 술은 찾을 수 없었다. 못 보고 지나쳤던 것인가 싶어 천천히 다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에이, 술이 없네 이 가게에는. 아까 생수가 어디 있더라? 입이 텁텁하여 설탕맛 음료수는 별로 당기지 않고, 그냥 물이 낫겠다. 큰 걸 살까 작은 걸 살까? 숙소 도착하자마자 양치부터 하고 싶다.


 작은 생수를 하나 집어 들고는 계산대에서 계산한 다음 밖으로 나와 그녀를 만났다. 짜잔 하며 생수를 그녀에게 보여주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낸다.


 “물 하나 사온다더니 뭐 이리 오래 걸려!”

 “응? 그냥 이 동네 물가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렇게 오래 걸린 건 아닌데?”

 “지금 몇 신줄 알아? 해 지기 전에 숙소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단 말이야. 밝을 때 도착하고 싶다고 비행기 안에서 몇 번을 말했니?”


 맞다. 그녀가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뭘 얼마나 시간을 지체했다고 나한테 짜증을 내는 거야? 결국 우리는 상한 기분으로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지하철 개찰구에 도착했다.


 이스탄불 지하철의 티켓머신은 우리에게 플라스틱 토큰을 두 개 토해냈다. 으음,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 사용하는 걸까요?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는 예기치 못한 낯선 상황을 갑작스레 대면할 경우 약간의 패닉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 한국이나 일본에서처럼 종이 내지는 그러한 재질로 된 직사각형의 티켓이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자 고래군 우선 침착해. 아무리 낯설어도, 결국 메커니즘은 다르지 않을 거야. 잘 관찰하면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야. 자 우선 개찰구 기계는 한국과 비슷하게 생겼어. 티켓을 넣어도 좋을 것만 같은 가늘고 긴 구멍이 뚫려있고, IC칩을 인식하는 어린이 손바닥 크기의 패널이 있다. 혹시 이 플라스틱 토큰 안에 IC칩이 있나? 지하철 일회용 교통카드처럼 말이지. 그래 우선 저기에 갖다 대 보자. 어어?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럼 토큰을 저기에 넣는 것인가? 아니 잠깐만 만약 저기에 넣는 게 아닌데 집어넣었다가 꺼내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기 잠깐만. 이거 여기에 넣는 거 맞지?”

 “오빠 뭐 해? 안 가요? 왜 그래? 지하철 처음 타 보는 사람처럼?”

 “응? 이거 여기 넣었는데 안 나오면 어떡해?”

 “응? 안 나오던데? 그냥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응? 안 나와? 원래 그런 거야?”

 “몰라요. 나도 여기 처음 와보는 곳이란 말이지.”


확실히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유연하고도 즉각적인 반응과 대처는 나보다는 그녀가 훨씬 앞서는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우선 가보면 되는 거지 뭐.





#3. 서둘러! - 미니양 


 터키에 도착한 시각은 늦은 오후.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빠져나오면서부터 슬슬 불안했다. 이스탄불 숙소가 있는 곳의 지도를 미리 확인했을때 꽤나 복잡한 구시가지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호텔이나 호스텔이 아닌 아파트였기에 지도에 제대로된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 동안의 경험에 미루어볼때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는 대도시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상황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밝은 시간에 숙소를 찾아가는 것이 숙소를 찾아가는게 조금더 수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고래군은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밍기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밍기적대마왕이라고 부를만큼 고래군은 모든 일이 느긋했다. 평소에는 느긋해서 좋을 때가 더 많았지만 어둑해지는 이런 상황에서는 서둘러주길 바랐다. 그러나 생겨먹은게 어딜가나 고래군은 여전히 느긋했다. 그런 고래군의 모습을 보다가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빠! 빨리 가자. 더 늦으면 숙소찾기 힘들거야."

 "에이. 잘 찾아가면 되지."

 "너~ 나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그 때까지의 고래군은 누구보다도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느긋했다. 그런 고래군의 모습은 약 한 시간 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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