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이스탄불
#1. 이스탄불의 지하철, 뭔가 조금 다르네.- 고래군
우리가 준비한 숙소까지 가려면, 우선 공항에서 지하철을 탄 다음 한 번 환승해야 한다. 앞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인포메이션에 찾아가서 지도를 받은 다음 주소를 보여주며 가는 길을 묻자, 앉아있던 불친절한 아저씨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중간에 T1으로 갈아탄 다음 ‘베야즛- 카팔차르쉬 Beyazıt-Kapalıçarşı’에서 내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도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큼지막하게 쳐준 다음 그 근처일 거라고 알려준 것이긴 하지만, 뭐 ‘Fatih’로 시작하는 길다란 숙소 주소가 있는데 찾아가는 게 뭐가 문제겠어. 근처에 가서 길을 찾으면 되겠지.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Fatih’가 그냥 동네나 길거리(street) 이름인 줄만 알고 있었다.)
환승해야 하는 ‘제이틴부르누 Zeytinburnu’역에서 내려 T1이라 표시된 곳으로 가려니, 갑자기 개찰구가 또 등장한다. 그런데 개찰구가 두 군데로 나뉘어 있다. 으음, 저쪽은 사람들이 그냥 막 나가네? 나가는 길인가? 그리고 이쪽은 교통카드를 패널에 대고 지나간다. 나는 교통카드가 없는데? 막막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우리는 개찰구 주변을 한동안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키는 역무원도 없나?
우리 바로 앞을 걷던 네 가족이 있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다섯 살 정도 된 아들과 더 어려서 성별을 잘 알 수 없는 갓난아이 동생. 터키인처럼 보였는데, 적어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닌가보다. 우리와 더불어 개찰구 주변을 방황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러더니 아빠가 개찰구 옆 기둥에 매달린 작은 기계에서 토큰을 다시 사서, 앞서 아타튀르크역에서처럼 들어서는 것이다. 저게 맞는 걸까? 아타튀르크에서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는 게 아니었나?
“오빠 아무래도 노선이 달라지면 티켓도 새로 사야 하는 건가 봐요.”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교통비가 너무 비싸지는데?”
그런 우리를 보고 앞서 네 가족 중 다섯 살 소년이 우리 앞을 지나던 중 멈춰서더니, 손을 흔들면서 토큰 기계를 손짓으로 가리킨다. 우리에 대한 염려와 거짓 없는 호의가 담긴 아이의 맑은 눈빛에 걱정이 밤하늘 너머로 흩날리듯 희석되어간다. 그러고 보니 공항에 내려앉을 때까지만 해도 금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던 태양은, 지하세계를 다녀오는 동안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개찰구를 지나니 역사 건물 바깥으로 길이 이어지고, 가슴 높이의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트램 플랫폼이 나타난다. 아하! T1의 T는 트램을 의미하는 것이고, M노선은 메트로를 뜻하는 약자였구나! 몇 사람이 플랫폼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취리히 공항에서부터 잊고 있던 흡연에 대한 욕구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나 담배 하나만 피울게요.”
“그럼 나는 어느 방향으로 타는 건지 알아보고 올게.”
불을 붙이고, 한숨과 함께 연기를 까만 하늘로 불어 보낸다. 두 개의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도 같다. 문득 아까 보았던 아이의 눈빛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지금 나에게서 어떤 빛의 눈동자를 보고 있을까? 두어 번 더 한숨을 뱉어내고 나니 왼편에서 굉음과 함께 트램이 들어온다. 우리가 타야 하는 것이 저걸까? 눈길을 돌려 그녀를 찾는다. 다행히도 손을 절래절래 흔드는 것을 보니 반대편인가 보다.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한 번 더 한숨을 쉰다.
“오빠!”
“응? 거기 있지 왜 왔어요. 나 곧 갈 건데.”
“왜 안 와? 저거 타야 한다니까? 어어! 문 닫힌다!”
“응? 저거 아니라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라고 손짓하니까 고개 끄덕이기만 하고 왜 안 오는 건데?”
다시 도착한 트램 한쪽에 그녀와 서있자니,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람들 왜 이리 쳐다보지? 관광객 많이 찾는 도시 아닌가?”
“거의 유럽 사람들이 많이 오지, 한중일에서는 아무래도 멀어서 상대적으로 잘 못 본 거 아닐까? 그런데 어째 오빠 말투가 나도 여기 처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거 같다?”
“어? 그러게요. 난 왜 당신은 어디든 한 번 다녀왔을 것만 같지? 아무튼 이제 숙소 도착하면 나는 양치질부터 할래. 입이 텁텁하다. 배도 고프고 술도 고파.”
“나는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야.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그렇게 서둘렀는데, 벌써 깜깜해져 버렸고.”
“에이 걱정 마요. 인포메이션에서 지도에 이렇게 위치까지 표시해줬잖아.”
“그럼 오빠가 알아서 찾아가 봐요. 난 몰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디 한 번 두고 볼 테다’하는 기색이다. 취리히에서도 밤길을 헤치고 잘 찾아갔고, 그 전에 도쿄에서도 밤에 숙소 도착했는데 뭘. 걱정 말라는 나의 말에 그녀는 혼잣말을 나직하게 흘린다.
“구시가지일 텐데…”
#2. 이스탄불의 밤은 낯선 자를 반기지 않는다.(1)- 고래군
그러고 보면 스위스에서 그랬고, 이스탄불도 마찬가지인 것이 있다. 지하철이나 트램의 안내방송이 간략하고 명확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역 이름만 두어 번 반복하고는 안내방송이 끝나버리고, 기껏해야 환승 안내를 덧붙이는 것이 전부이다. 한국에서는 기나긴 안내방송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던 반면, 이쪽에서는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는 느낌이 한결 산뜻하기만 하다.
우리는 ‘베야즛- 카팔차르쉬 Beyazıt-Kapalıçarşı’에 내렸다. 자동차가 달리는 길 한가운데 나지막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플랫폼 끝에 바깥으로 나가는 개찰구가 있고, 그 옆에는 제복을 입은 남성 한 명이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트램의 불투명한 유리창에 가려져 있던 이국성 짙은 풍경과 소리로 가득한 짙은 어둠 한 가운데 우리는 그렇게 던져진 채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지도대로라면 아마도 저 길로 들어가서 쭉 내려가면 될 거에요.”
“오빠 저기 정말 맞아요?”
“맞는 거 같아. 아니면 다시 되돌아 나오면… 뭐야 엄청 내리막길이네.”
길은 되돌아 나오려면 꽤나 힘들겠네 싶을 정도로 제법 가파른 편이었다. 사실 오르내리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정도이긴 하지만, 제법 무거운 짐을 짊어진 상태로는 내려가는 것도 미끄러질까 조심스러워지는 데다 다시 올라오게 된다면 꽤나 고단해지겠다 싶은 정도의 경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어둡고 낯선 저 길로 어쨌든 나를 던질 수밖에.
“이 동네에 흑인들도 종종 있네?”
“아무래도 아프리카에서 가까운 편이라 그런가보죠 뭐.”
“발 조심! 거기 아래 젖었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오빠 나 애 아니거든? 그나저나 어디까지 가야 해?”
“잠깐만요? 지도 좀 보고 가자 우리.”
공항 인포메이션 아저씨의 볼펜은 트램에서 내린 다음 바닷가 도로를 만나는 지점까지 남쪽으로 길을 (잘 선택한 다음) 따라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지역을 여러 차례 그린 동그라미로 이루어진 동심원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이대로 걸어 내려가면 되네.”
‘어어, 파티흐(Fatih)면… 대충 아마 여기 어디일 거야.’라는 인포메이션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어른거린다. 그래. 일단 그 근처에 도착한 다음 ‘Alişan Sok.’ 어쩌고 하는 우리의 새로운 집(?!)으로 찾아 들어가는 거야.
머지않아 가파른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레스토랑이 밀집한 골목이 나타났다. ‘니하오’ 내지는 ‘곤니찌와’(이 밤중에?) 따위의 인사말 사이로 ‘안녕하세요’라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머나먼 땅에서 모국어를 듣게 되면 느끼는 반가움은 우선 뒤로 한 채 나는 지도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음식점 앞에서 우리를 부르는 수많은 이들을 헤치고 골목 끝에 이르러 지도에 표시한 곳에 도착하니 짦은 터널이 하나 있고, 그 너머로는 많은 자동차들이 엔진소리를 울부짖으며 내달리는 케네디(Kennedy cd.) 어쩌고 하는 큰 도로가 나타났다.
“오빠. 아무래도 여기는 숙소 같은 게 없어보이는데?”
“응? 내가 봐도 그렇네. 이제 여기서부터 찾아봐야지.”
“잠깐! 그럼 위치를 정확히 알고 가는 게 아니었어? 이제부터 찾아본다고?”
“응? 네. 이 근처 어디라고 지도에 표시해줬으니까, 우선은 표시된 곳까지 찾아오는 게 우선인 거 아니야?”
“바보야! 그럼 다시 되돌아가서 길을 묻든가 찾든가 해야 하잖아. 그럴 거면 오면서 찾아봤어야지! 하여튼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못 하지 오빠는, 으이그.”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오는 길에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1차 목적지가 이렇게 황량한 곳일 줄 내가 알았나 뭐.
다시 뒤로 돌아 레스토랑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으로 난 길에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 남성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무안해지기 시작한 나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 길을 묻는다.
“안녕.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안녕. 그래.”
“파티흐가 어디야?”
“여기가 파티흐야.”
“그래? 우린 숙소를 찾고 있는데, 파티흐에 있다고 했거든.”
그러자 오른팔을 하늘로 향한 채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그가 말하기를,
“여기가 전부 파티흐야. 여기도 파티흐, 저쪽도 파티흐. 전~부 파티흐인데? 주소 없어?”
그에게 주소를 보여주니, 미간을 찌푸린다. 아마도 ‘여기가 어디지?’라는 의미겠지. 이윽고 우리를 이끌고 레스토랑골목으로 가볍고도 빠른 걸음으로 가서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던 아까 그 남자에게 우리를 가리키며 말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더니 ‘안녕하세요’ 남자가 우리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한다.
“저기로 가다가 왼쪽으로 하나, 둘! 두 번째 길로 가면 돼. 잊지 마. 하나, 둘! 알았지?”
이 녀석들! 엄청 친절해! 진작 물어봤어야 했어!
#3. 이스탄불의 밤은 낯선 자를 반기지 않는다.(2)- 고래군
그가 알려준 길에 접어들자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캄캄한 골목이 나온다. 정말로 캄캄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가로등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인가? 어쩌면 위험한 동네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갑자기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과연 이 길로 가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어둠을 헤치고 걷다 보니 맞은편에서 몇 명이 무리지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나는 그녀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고는 걸음을 옮긴다. 제발 그냥 지나쳐라. 제발 그냥 지나가.
옅은 빛을 내뿜는 작은 구멍가게가 나타난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요리사처럼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젊은 녀석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는 다시 그에게 길을 묻는다. 스마트폰에 표시된 주소, ‘No. 85 Alişan Sok.’을 가리키며 여기를 찾고 있다고.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그 친구는 우리를 이끌고 구멍가게로 들어가서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알리샨 소칵이 어디더라?’는 투로 길을 묻는다. 그나저나 한국에서는 ‘미안해요 몰라.’에서 그치곤 하는 반면, 이 동네는 자기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묻는 게 당연한가보다. 어쩌면 서로 잘 알고 지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서울에서처럼 바로 옆집 사람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이상한 거잖아 사실.
다시 가르쳐준 길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든 채로. 배에서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남겨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래도 다행이다. 혼자는 아니라서.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하다. 만약 그녀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다면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헤쳐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불안을 안고 길을 재촉하던 와중이었다.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방금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준 그 녀석이 저만치서 우리 뒤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왜 쫓아오는 거지? 아니 그냥 저 녀석도 이쪽으로 가야 했던 걸까? 아 저기 새로운 구멍가게가 있다. 저기 밝은 곳에 잠시 멈춰선 다음 저 녀석을 먼저 앞서 보내야겠어.
“오빠! 아무래도 저쪽같은데?”
“응? 그래. 응? 네? 어디?”
“숙소 예약할 때 길 모양이 이렇게 꺾어졌던 거 같아. 85번지였죠 주소가?”
“네? 네.”
어두운 골목 끝 오른쪽으로 급격히 꺾이는 길로 갑자기 그녀가 가볍게 달음박질친다. 그리고 나 역시 급한 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사위가 밝아진다. 바로 벽 건너편 가로등이 길 위로 빛을 가득 뿌려주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아니, 그보다는 험난한 여정의 끝이 갑자기 내 눈앞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4. 더이상 방황은 싫어! - 미니양
터키에서 첫 날인데, 혹시 밤새 길을 찾게 되진 않을까? 여긴 어디? 무서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우리가 예약한 아파트 간판이 눈 앞에 보였다. 드디어 방황의 끝. 쌀쌀한 날씨였지만 45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느라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약할때 봤던 사진이랑은 아주 많이 다르지만 이 한 몸 뉘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싶은 마음에 기뻤다. 우리는 우선 배낭을 내려놔야했고, 저녁을 챙겨먹어야 했으며, 숙소를 찾으며 궁금했던 이스탄불의 야경을 보러 나가야했다. 아! 그리고 찐~한 커피도 한 잔 마셔야했다.잘 곳이 해결되니 밤이라 무섭다는 생각은 다 잊어버렸다. 그저 이스탄불의 야경을 보러 나가는 길이 신나기만 했다.
자, 이제 이스탄불을 구경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