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이스탄불
#1. 이스탄불, 역시 처음 만나는 도시는 걸어봐야지! - 고래군
“여기 많은 나라 사람들 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고. 내 트위터에는 한국인 친구도 많아.”
우리가 며칠 동안 집으로 삼았던 파티흐의 아파트 관리인(?)이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이다. ‘알라토프 꼬레안 프렌즈’라는 말(나중에 알고 보니 ‘a lot of’라는 말이었다.)을 몇 번이나 해대는 그 친구가 보여준 푸근한 미소와 환영음식으로 건네준 한 접시의 과일 덕분에 우리는 푸근한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살짝 걷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먼저 눈을 떴지만, 침대가 붙드는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가만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눈부신 햇살이 전하는 두근거림이 다시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나직한 아침 침대의 가벼운 게으름을 덮은 채로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그 햇살을 응시했다. 첫 날 심연보다도 깊은 어둠처럼 보이던 이스탄불의 하늘은, 전날 밤을 헤매던 나의 덜 여물음을 놀려대기라도 하듯 싱그럽고 선명한 아침햇살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축복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어느 장소를 여행하더라도 아침에 분주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공간의 주인이구나 하는 느낌을 전해준다. 삿포로나 도쿄의 출근하는 사람들이라든가, 아니면 루앙프라방에서 탁밧을 하는 어린 승려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오늘 아침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기 위해 모자란 잠을 기어코 떨쳐내는 데 성공한 당신처럼 말이다.
이스탄불에서의 둘째 날. ‘오늘은 뭐 하지?’라는 질문에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
“갈라타 타워 가볼까? 지도 보면 갈라타 다리 건너면 바로 있는 거 같은데.”
‘갈라타’라고? 축구팀 중에 ‘갈라타사라이’라고 있었는데? 베식타스랑 더불어 나름 유럽에서 먹어주는 터키 국적의 강팀이잖아. 나는 그녀가 내미는 지도, 즉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었다.
“술탄 아흐멧 지나서 금방 다리 나오네? 다리 건너면…… 갈라타 타워. 금방이네! 걸어갈까?”
“거리 좀 되는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그런가? 지도로는 얼마 안 멀어 보이는데?”
“구글맵에는 높낮이가 안 보이잖아. 보니까 갈라타타워 있는 데가 좀 높은 거 같던데?”
“그런가? 그래도 뭐 짊어지고 다니는 거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그녀의 눈빛은 ‘이 인간 뭘 믿고 또 자신만만한 거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싱그러운 날씨를 걷지 않으면, 도대체 이 도시를 언제 어느 날 거닐어보겠어. 게다가 공간을 제대로 만나려면 느린 게 좋은 법이거든. 속도는 거리를, 공간을 소멸시키는 법이니까.
#2. 쿰피르, 내 인생 가장 큰 감자 - 고래군
뭐 어쨌든 이스탄불은 이방인의 두려움과 신기함으로 가득한 눈빛을 무척이나 즐기는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 ‘헬로 마이 프렌드’라고 외치면서 나에게 손짓하는 이 동네 사람들도 그렇고, ‘네가 그냥 날 지나칠 수 있겠어?’라고 자신만만하게 유혹하는 시미트 파는 노점의 고소한 향기도 그렇고 말이야. (결국 그녀와 나는 시미트를 하나씩 사들고 트램이 달리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 것은 물론 그녀의 시미트마저 반 정도 뜯어먹으면서 술탄 아흐멧이 나온다. 하지만 저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흐릴지도 모르는 내일로 미루고, 우리는 오늘 그 너머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그렇게 길을 따라 갈라타 다리까지 쭉 가면 되는 거지만, 종종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나의 이상한 습관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말았다.
“나 저기 궁금해!”
“응? 저기 뭐가요?”
“저기 팻말. ‘TOPKAPI PALACE’면 궁전 아니야? 그냥 뭐 있나만 보고 돌아와서 마저 가던 길 가자!”
이정표를 따라 길을 걷다 보니, 우리가 짐을 푼 사람냄새 가득한 거리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단정한 건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녹색으로 가득한 공원이 나타났다. 궁전은 어디 가고 공원이 나오지? 뭐 아무려면 어때.
그녀와 함께 공원(나중에 알고 보니 ‘귈하네 공원 Gülhane Parkı’이라는 곳이었다.)을 걷다 보니, 여행자들보다는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아이를 안고 수다를 떨며 걷는 젊은 엄마들이나 벤치에 앉아 다음 시간을 가만히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참 좋다.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여유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한없이 부럽기만 한 모습들.(무엇보다도 조금만 걸어도 쉴 수 있는 벤치가 많다는 점이 서울과 이스탄불이 가지고 있는 여유와 관용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서울은 벤치가 많으면 부랑자 모인다고 되려 줄이잖아.)
걷다 보니 정작 가려던 갈라타 다리, 아니 그 전에 톱카피 궁전마저도 ‘나중’으로 밀려버렸다. 푸른 나뭇잎 사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투명한 햇살을 통해 보는 이스탄불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나는 이미 매혹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득 우리 앞에 펼쳐진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주저앉은 카페에서 만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맛있는 감자, 쿰피르’에 나는 벌써 반해버린 것이다.
#3.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 - 미니양
고래군과 나는 여행스타일이 꽤나 잘 맞는 편이다. 꼭 봐야하는 것도 없으며, 꼭 먹어야하는 음식도 없다. 그리고 예정된 계획도 역시 없다. 그래서 이스탄불에서의 본격적인 첫째날이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별로 생각해놓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무 예정없이 나선 길. 우연히 귈하네 공원을 만났고, 우연히 멋진 전망을 가진 카페를 만났다. 그리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는 그대로 카페로 발을 들였다. 그 곳에는 차를 마시던 친구들도 있었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도 있었으며, 어느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도 있었다. 그냥 그런 풍경들이 참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여유로운 여행이었으니까.
돈데크만 닮은 주전자의 차와 내 얼굴만한 쿰피르를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그 풍경을 여유롭게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