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이스탄불
#1. 수백 년 전에도, 수백 년 후에도 - 고래군
파티흐 지역을 거닐다 보면 아주 오래전에 지어졌음이 분명한 건물들이 종종 눈에 띈다. 랜드마크인 ‘블루모스크’라는 별명을 가진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나 ‘아야 소피아’ 같은 장엄한 녀석들 둘째 치고, ‘그랜드 바자르’나 ‘에집션 바자르’에만 들어서기만 해도 가게가 있는 건축물이 ‘정말 오래된 것’이라는 향기가 물씬 풍긴다.
문득 수백 년 전 내가 걷고 있는 지금-여기를 누군가가 걷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마 오스만 제국이거나 아니면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찬란한 페르시아의 도시였고, 한때는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지? 당시에는 한없이 뒤쳐진 문명을 가진 유럽 사람들에게 오리엔트는 신기한 문화와 물건들로 인해 동경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강력한 힘으로 인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왜 영화 <300>을 보면 알 수 있잖아. 페르시아의 군대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렇게 괴물처럼 그려졌겠어.
“오빠 무슨 생각을 하길래 갑자기 말이 없어?”
“응? 아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아마도 수백 년 전에도 누군가가 걷고 있었겠지?”
“그렇겠죠?”
“그래서 말인데, 백 년 후에도 지금 이 길을 누군가가 걷겠지?”
그나저나 ‘백 년 뒤’를 인식하는 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일까 아니면 시간이 계속 흐를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신앙일까? 무슨 소리냐고요? 과거와 현재는 실재했던 거지만, 사실 미래는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에 불과한 거잖아.
“그렇겠지. 그때까지 지구가 망하지만 않는다면.”
아아, 지구가 망하거나 내가 사라지면 그런 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저기 보이기 시작한 갈라타 다리가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러시아 쪽으로 하나처럼 붙어 있잖아 그 둘은. 인간이 구분하고 인식하는 건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일 수도……
“그나저나 오빠. 고등어 케밥 파는 데 찾아봐요.”
“응? 아아! 그 무슨 아저씨네?”
“응. 무슨 아저씨네였더라? 기억 안 나. 아무튼.”
장엄미 넘치는 예니 모스크 앞의 광장에서 우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검색했을 때는 대충 이 근처 어디 있다고 했는데…… 무슨 아저씨네 고등어 케밥. 도저히 못 찾겠다. 바닷가에 있는 케밥 가게들을 기웃거려보지만, 어쩐지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분위기 같아서 발길이 향하지 않는다.
그렇게 방황하던 우리를 붙든 것은 광장이 거의 끝날 무렵 들려온 목소리였다.
[허이~ 헤이~ 여기 이스탄불에서 제일 맛있는 발리크 에크멕이 있어~ 허이~ 헤이~]
사실 ‘발리크 에크멕’, 그리고 ‘이스탄불’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치켜든 엄지손가락 덕분에 우리는 터키어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아저씨의 말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가게들보다 아주 착한 가격에 우선 발걸음이 멈춰 섰고, 어쩐지 이 동네 사람들만 이용할 것 같은 분위기에 우리는 가게를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2. 고등어 케밥 이거 이거 이거!! - 미니양
사실 터키에서 고등어 케밥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괜스레 먹고 싶지가 않았다.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하면 그냥 괜히 먹기 싫어지는 뭐 그런 반항심이랄까? 하지만 워낙에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궁금하긴 했다. 그러던 중 고등어 케밥을 판다던 갈라타 다리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그런 곳은 거부감이 생겨 들어가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던 중 호객 목소리에 이끌려 한 가게로 들어갔다. (사실 테이크아웃 전문점처럼 생긴 곳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있었던 게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고등어를 굽고 있는 이 곳은, 직원들은 꽤나 친근했고 가격 또한 매우 착했다. 고등어 케밥 2개를 주문하고 앉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현지인들 몇몇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갈라타 다리에 있는 식당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동양인 관광객들이 길가에 앉아 있었던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샌드위치처럼 포장된 고등어 케밥이 나왔다. 레몬을 뿌려 한 입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거다. 비리고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을 간단히 넘어서는 그런 맛.
"오빠! 나 이거 너무 맛있는 거 같아!"
"나도! 맛있어!"
"흐흐흐- 이거 먹고 더 먹을 테다."
"하하하. 그래요."
평소에 식사를 천천히 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정신없이 허겁지겁 나에게 할당된 고등어 케밥을 해치웠다. 더 먹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다른 맛있는 것도 먹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힘겹게 엉덩이를 떼고 가게를 나왔다.
#3. 다음에 이스탄불에 갈 땐 옷을 안 챙겨갈 거야- 고래군
갈라타 타워에서 탁심 광장 사이에는 ‘이스티클랄’이라는 길거리가 있다. 널찍한 길 좌우로는 여러 나라의 온갖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길기는 또 엄청 길어서, 천천히 구경하며 걷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은 족히 필요하다. 그나저나 중간에 있는 쇼핑몰 3층에서 간신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이렇게 길이 멀어서 사람들이 트램에 매달리다시피 올라타는 것이었나 보다. 어쨌든 그래도 역시 걷는 여행에만 존재하는 즐거움은 따로 있는 법이다. 사람들을 헤치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문득 멈춰 섰다.
“어? 잠깐만요.”
“응? 뭐 있어? 아우 진짜 사람 왜 이리 많아. 주말 명동 걷는 기분이야.”
“우리 저기 가볼까?”
“골목에 뭐 있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쩐지 북적거리는 것 같아.”
“사람 많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오빠 사람 많아서 지금도 짜증내잖아.”
“응! 왠지 뭔가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돌아 나오지 뭐.”
그렇게 들어선 골목은 옷을 잔뜩 걸어놓고 파는 구역이었다. 마치 동대문 시장처럼 수많은 옷들을 빼곡하게 걸어놓고 팔고 있었는데, 우선 가격이 정말! 정말! 쌌다. 인파에 지친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얼이 빠져있던 나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외쳤다.
“싸다! 여긴 보물창고야!”
“오빠! 이거 어때? 이 티셔츠 입어볼래요?”
회색 티셔츠를 꺼내 든 그녀가 내게 그것을 펼쳐 보인다. 산타할아버지가 마법의 까만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들고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관능적인 붉은색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Coca Cola’
“응? 산타 할아버지네? 편해 보이는데? 이거 얼마야. 오오! 오오!”
“마음에 들어?”
“응!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원래 터키 명절에서 유래한 거라지 않았나?”
“그랬나? 아무튼 이 티셔츠 사는 거다?”
“응! 당신 입을 옷도 좀 찾아보자!”
아마 다음에 다시 이스탄불에 오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이 골목을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쇼핑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를 열광하게 만들 정도니 말이야.
그리고 2015년 7월 어느 날 나는 그 티셔츠를 입고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