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터키 ::: 셀축
#1. 저 별빛처럼- 고래군
터키의 밤은 한국보다 더 어둡다. 모두 밝히기에는 엄두가 안 날만큼 대지가 드넓기 때문일까? 어쩌면 빛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닐까? 마치 버스 유리창에 새겨지듯 내려앉는 저 별빛처럼.
어느새 이스탄불의 풍경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한 그녀와 나는 짐을 짊어지고 셀축(Selçuk)으로 가는 야간버스에 올라탔다. 아직 가보지 못한 이스탄불의 모습들이 차창 밖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해가 진다.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와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버스가 멈춘 것이 느껴진다. 깨어보니 우리를 태운 버스가 배를 타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대로 다시 잠들고, 어떤 이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화장실도 이용할 겸 우리도 버스에서 내렸다. 바람에서 약간 짠 내음이 나는 걸 보니 우리는 지금 강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자 배에서 내린 버스가 다시 밤을 가르고 달린다. 그녀는 다시 잠들었다. 문득 며칠 전 마셨던 ‘라키(Raki)’ 향기가 그립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불편하다. 아니면 바닷바람을 들이마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 어쨌든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밤이다.
“오빠! 일어나!”
“응? 네?”
“거의 다 온 거 같아. 숙소까지 가는 약도 한 번 보자.”
“응. 잠깐만요.”
“오빠 어디어디 가보고 싶어?”
“뭐뭐 있는데?”
“에페소 유적이 유명하다 했고, 당일로 바다 보러 다녀와도 되고요. 같이 찾아봤던 거 기억 안 나니? 너 아직 잠 안 깼지! 얼른 일어나!”
그나저나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불편하지만, 확실히 낯선 곳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레인다.
버스터미널에 내린 우리를 향해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이 동네에서 우리 호텔이 제일 좋아.]
[우리 이미 예약했는데?]
[그래? 어딘데? 예약한 호텔이 어딘데?]
[아르테미스 호텔.]
[아! 거기가 내 호텔이야!]
[진짜?]
이스탄불에서 한밤중에 숙소를 찾느라 헤매던 기억에 데인 나는 이미 위성사진까지 동원해서 가는 길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호텔 주인아저씨가 이른 아침부터 터미널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 1층 로비에 들어섰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일찍 체크인할 수 없으려나?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배낭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으니, 그제야 좀 살 것 같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 철문에 무엇인가가 프린트되어 붙어있다. 한글로 이런저런 가이드가 프린트된 종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텔 사장아저씨가 한국 여성과 결혼했더라.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는 길에 만나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도 나눴다.)
다행히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4인실이었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우리 둘이서 방을 독차지했다.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이대로 다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오빠 일어나~”
“응? 우리 좀 자도 되지 않을까?”
“이른 아침인데, 차라리 어디 다녀온 다음 일찍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도저히 못 움직이겠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그냥 등이 침대에 붙어버렸어.”
“당장 일어나라~ 에페소 유적 가보고 싶다며~”
이를 악문 소리로 ‘일어나’라고 할 때는 얼른 일어나야 안 혼난다. 어젯밤 챙겨온 빵을 뜯어 물과 함께 먹고 허기를 달랜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햇살을 맞으며 길로 나섰다. 우리가 내렸던 그 터미널에서 에페소 유적까지 가는 미니버스, 돌무쉬(Dolmuş)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2. 이제는 고양이의 도시, 에페소- 고래군
에페소(Ephesos), 또는 에페수스(Ephesus). 이제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가득한 고대도시가 궁금했다. 왜 궁금하냐는 그녀의 질문에는 ‘그냥’이라고 답했다. 수천 년 전 나와 같은 사람이 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니까 궁금했어. 어쩌면 내 머나먼 조상 중 한 명이 여기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입장권을 끊고 들어서서 길을 걷다 보니 발굴해낸 석재들을 늘어놓은 공터가 나오고, 그 너머로 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만든 원형극장이 멀리 보인다. 웅장함은 둘째 치고 지금 저기 굴러다니는 건물 잔해로 보이는 돌덩이들이 최소 이삼천 년 전에 누군가가 조각한 것이라는 사실이 낯설고 또 신기하기만 하다.
쭉 뻗은 길을 그녀와 걷는다. 젤리 한 봉지를 꺼내 하나씩 나눠 먹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덧없게 느껴진다. 수천 년 전에도 (비록 젤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 있었을 것이다. 상상 속에서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 두터운 시간의 흐름을 갑자기 인식했기 때문이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밤하늘의 모습도 변한다고 했다. 별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난밤 내가 봤던 별빛과는 다른 하늘을 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먼지가 되어 바람에 실려다니고 있다. 잠깐, 그럼 내가 지금 숨쉬는 이 공기가……
“오빠 재밌어?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응? 아. 그냥 내가 밟고 있는 이 길을 어쩌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최소한 그들의 지인 한 명쯤은 걸었을 거야. 그런 생각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난 그리스에 갔을 때 이미 이런 유적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별 감흥이 없네요. 그래도 오빠라도 좋아서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가 참 많다. 오래 전 사람이 살았던 이 도시는, 이제는 고양이들이 무리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양이 열 몇 마리가 한꺼번에 주변으로 모여든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마도 저 고양이들은 인간들에게서 먹이를 약탈한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몰라.
#3. 에페소 유적을 걷다 - 미니양
고래군이 에페소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번 여행 어차피 정해진 것은 없었다. 대략적인 그림만 머릿속에 그려져 있을 뿐. 확실한 것은 약 3주 후에 부쿠레슈티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한다는 것. 그 전까지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보기로 한 것이다. 고래군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에페소 유적을 보러 셀축으로 향했다. 난 꽤 오래 전 이미 그리스에서 고대유적들을 많이 봐서 그닥 큰 흥미가 없었지만, 고래군은 이런 문화나 유적에 관심이 많았다.
에페소 유적을 돌아보면서 난 오래 전 그리스 여행의 기억을 떠올렸고, 고래군은 신기한 눈으로 구석구석 에페소를 스캔했다. 가끔 흥미로운 것들을 접할 때면 나오는 고래군 특유의 표정과 행동이 있다. 꼭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 같았다고나 할까? 난 그저 에페소를 걷는 것으로 충분했다. 꼭 역사를 알지 않아도, 꼭 무언가를 공부하고 가지 않아도 그냥 그 시절 사람들처럼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했으니까.
잠을 설쳐가며 야간버스를 타고 셀축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셀축에는 에페소가 가장 유명했지만, 그 이외에도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