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일상을 떠나 다른 일상으로 들어오기까지 - 미니양
어느 날, 나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통장에 남아있던 얼마 남지 않은 잔고도 포기한 채 그냥 훌훌 떠나고 싶었다. 고래군와 상의를 하고 고민한 끝에, 우리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리스본에서 한 달을 살아보기로 결정하고, 일사천리로 비행기 티켓과 아파트를 예약했다. 우리가 떠나는 디데이는 2월 28일. 내 통장 잔고는 다 버렸으나,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았기에 현재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암스테르담 경유 리스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밤 비행기였던 덕분에 11시간 남짓의 비행시간 대부분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전히 이코노미 좌석은 좁아터져서 잠다운 잠을 자기에는 너무너무 불편했지만, 그래도 피곤한 몸에 맥주까지 더해지니 곯아떨어지게 되더라. 밤새 시간을 거슬러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리스본이었지만, 비행 편은 바로 연결되지 않아 8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공항에서 잠이나 잘까 하다가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아침이나 먹자 싶어 출국심사를 받고 나왔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추웠고,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기차 티켓 끊기 전에 알았더라면 그냥 공항에서 잠이나 잤을 텐데,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의 비 오는 풍경을 봐버렸다. 급하게 목도리 하나를 사서 목에 두르고 암스테르담 중앙역행 기차에 탔다.
유럽 여행 중에 네덜란드를 들른 적은 없었다. 가고 싶은 나라 위주로 동선을 짜다 보니, 네덜란드는 항상 빠지게 되었다. 나에게 네덜란드의 첫 모습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너무도 추운 곳이었다. 첫 방문의 혹독한 신고식이려나? 이미 시내로 나왔으니, 중앙역에서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은 덴마크 코펜하겐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기자기한 모습에 소녀 감성인 우리 엄마가 좋아하겠다 싶은 느낌이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추워서 더 이상은 걸을 수 없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쯤 우리의 눈 앞에 스타벅스가 나타났다. 카페에 들어선 순간,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에 처음으로 고래군과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때쯤 우리는 카페를 나왔고, 그 사이에 다행스럽게 비는 그쳐있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암스테르담을 짧게 둘러본 후 리스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22시간 만에 최종 목적지인 리스본에는 도착했을 땐 우리는 이미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피곤함에 취해있었다. 2월 28일 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22시간이 흘렀는데도 리스본에 도착헀을땐 아직 오후 시간에 불구했다. 아무리 시간을 버텨내도 2월 28일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2월 28일은 끝나지 않았다. 2월 28일의 마지막 고비는 알파마 지구의 살벌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아파트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30분 간의 언덕 등산(?) 끝에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우리의 기나긴 하루는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봉지라면 2개와 햇반으로 겨우 허기를 채우고 그대로 기절하며, 우리의 2월 28일은 끝이 났다.
#2. 서른 두 시간의 하루가 저물고- 고래군
우리가 도착한 숙소는 알파마Alfama 지역에서 가장 높은 동네에 있었다. 온 몸을 적신 피곤함 때문에, 이대로 어딘가 따스한 곳에서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살려면 뭔가를 먹기는 해야겠지.
애초 생각은 밖에서 뭔가를 사먹든지, 장을 봐서 음식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장 쓰러져 잠들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상황에서 그 모든 계획은 전부 무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한국에서 챙겨온 봉지라면 두 개를 냄비에 던져 넣고, 물도 대충 부어서 끓였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싱겁긴 했지만, 어쨌든 드디어 서른 몇 시간 만에 뭔가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 챙겨온 즉석밥도 하나 데워 넣고는 허겁지겁 삼켰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정리까지 하고 보니, 아직도 오후 아홉 시도 채 안 된 시각이었다. 대체로 서울의 밤 아홉 시는 잠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다. 밤 아홉 시는 뭐랄까… 하루를 마치기 전 나를 위해 무엇인가 아직 채우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허우적거리기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지금-여기 리스본은, 적어도 지금 우리의 리스본의 밤 아홉 시는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도 인천공항에서 오늘을 살기 시작하고 서른 두 시간이 지났다는 피곤함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지금-여기의 밤 아홉 시는 어둡고 고요하다. 우리가 살기로 한 공간에 TV가 없기도 하거니와, 서울에서와 같은 밝은 빛도 없기 때문이다.
리스본의 밤 아홉 시. 서른 두 시간의 하루를 마치고, 드디어 마주하는
밤.
+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소소한 암스테르담 팁
- 스키폴 공항 슈퍼와 상점은 5시 정도부터 문을 열기 시작한다.
(새벽 4시에도 스타벅스와 버거킹은 문이 열려있었다.)
- 암스테르담의 상징인 I am sterdam 조형물은 시내 말고도 공항 청사 앞에도 있었다.
- 스키폴 공항-암스테르담 구간 기차는 새벽 5시 반이 첫 차이며, 15분 소요
- 스키폴 공항 짐 검사는 내 여행 인생 중 최고로 엄격했다.
(지나치다 싶은 엄격함에 기분이 상하려고 했지만, 요즘 국제정세가 그런지라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