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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고등학생 시절

by 미니힐

중학생


난생처음 입어보는 첫 교복, 설렜다. ‘내가 교복을 입다니!’ 좀 성숙한 언니가 된 거 같았다.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고 중학생이다!" 대단한 입문을 앞둔 것처럼 소리쳤다. 아이비클럽, 엘리트, 스마트 등의 교복 브랜드가 있었는데 내심 라인이 예쁜 엘리트에서 교복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이끌려 아이비클럽에 갔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클 수도 있으니 넉넉하게 사이즈를 입으란다.


3년 내내 키, 몸무게 그대로였다. 나는 품에 맞지 않는 큰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딱 맞게 예쁘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치마도 두 번 접어야 허리에 맞고, 길이도 맞았다. 큰 동복은 나를 더 왜소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학교 과제로 교복에 대한 글을 썼다. 여자도 남자처럼 바지 교복을 입어야 된단 글이었다. ‘교복을 예쁘게 못 입을 바엔 활동성 있고, 편하기라도 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단한 개혁이라든가, 대단한 주장을 한 건 아니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나의 글을 아이들 앞에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남자 애들은 ‘피식’거리며 웃었고, 국어 선생님은 자기주장을 잘 펼친 글이라고 칭찬해주셨다. 결핍과 억눌림은 때론 강한 주장이 되기도 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중2 2002년 월드컵. 우리 모두는 흥분 상태였다. 거리에 나와도, 버스를 타도, 학교, 학원에서도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을 외쳤고, 붉은 악마 Red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집에서 축구를 봐도 다 같이 보는 느낌 같은 느낌. 다 같이 환호하고, 다 같이 야유하니까 소리가 울렸다.


나는 친구와 함께 코엑스에서 포르투갈전을 관람했다. 다 함께 큰 스크린 앞에 앉았다. 너도 나도 페이스페인팅한 얼굴이었다. 경기가 시작됐고, 계속 점수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후반전에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 ‘슛~~~ 골입니다아~~~’ 응원만 열심히 한 나머지 누가 골을 넣은 지도 모르고 기뻐했다. 모르는 옆 사람과 껴안고, 손에 손잡고 대한민국 응원가를 불렀다. 뉴스를 통해 그날의 영웅이 ‘박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2002년 월드컵은 8강에서 그쳤다. 사실 축구도 잘 모르고, 선수들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날 대한민국의 뜨거운 열기는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생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상황과 환경이 달라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해야 했고, 성적이 좋아야 했고, 발표도 잘해야 했고, 재미도 있어야 했고, 예쁘기도 해야 했다.


사춘기 고등학생의 삶은 유난히 어려웠다. 반 성적에 민감했던 담임선생님. 우리 반이 성적 1등, 급식비도 1등, 운동회도 1등. 모든 수치에서 1등을 꿰차야 했다. 또 질문을 매우 싫어하셨는데...그런 분 앞에서 나는 첫날부터 질문을 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질문이었던 거 같다.

“그럼 그 자료는 언제까지 제출하면 되나요?”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 직감이 왔었다. 첫날부터 ‘네!’의 순종적인 자세가 아니라 ‘질문’부터 한 나의 태도가 선생님 눈 밖에 나기 시작한 것. 그날 이후 선생님에게 찍혔다. 급식비를 빨리 내지 못하면서, 성적이 계속 떨어지면서,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완전히 찍혀 버렸다.


왜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오는 걸까. 부모님 사이의 불화, IMF 이후의 아버지 사업의 어려움, 공부, 친구 문제, 담임선생님에게 찍힌 것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선생님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아니까 학교에 가면 더 눈치 보고 더 실수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언어폭력도 심했다.


“이 거지 같은 새끼야! 돈을 내고 처먹어야 될 거 아냐!”

“너 같이 실수 잘하는 애는 뭘 해도 안 될 거다!”


꼭 친구들 앞에서 혼을 냈다. 선생님을 만난 후 나는 수치심, 모욕감을 경험했고, 나중에는 우울증까지 찾아와 이 병마와 싸우느라 무척 힘들었다. 이 시기의 상처는 훗날 나의 아킬레스건으로 자리 잡아 여러 번 나를 걸려 넘어뜨렸다. 공공장소에서나, 사람들이 나를 주목한다거나 누가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얘기를 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 이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상한 선생님으로 유명했고 ‘이 거지 같은 새끼야!’가 트레이드 마크 욕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특별한(?) 선생님에게 찍힌 나는 고등학교 내내 선생님이 말하는 부정적인 피드백 토대 위에 나의 정체성과 자아를 세워나갔다. 학교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밤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거대한 우울감에 잠식당했다.


선생님의 말, 친구들의 동정 어린 시선, 떨어지는 시험 성적, 부모님 간의 불화, 재정적 어려움은 민감한 나를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그날의 환경, 그날의 표정, 그날의 수치심, 모욕감, 열등감을 나는 극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공부가 잘될 리가 없었다. 공부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나는 왜 이럴까?’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난 왜 태어났을까?’, ‘난 어떤 사람인가?’ 등등 후회와 자책과 수많은 질문들이 나를 짓눌렀다. 유쾌하고 쾌활했던 나의 친구들도 나의 우울한 기운과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멀어져갔다. 나는 더 외롭고 우울해졌고, 라디오와 책을 벗 삼아 그 시간을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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