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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힐 Dec 24. 2019

[책] 이국종의 골든아워 : 원칙주의자가 사는 법

골든아워1/이국종/흐름출판

골든아워에 뒤늦게 합류했다.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선뜻 도전을 못했다는. 압도적인 두께에 벌써 끼깅. 그래도 열심히 1,2권을 읽어왔다.


골든아워를 읽고 정리된 키워드는 이런 것이다. 치열한 삶, 원칙, 버티는 삶, 열악한 의료 생태계, 고구마 정치와 정책, 기록의 힘, 삶의 힘, 생사를 오간 사람들의 이야기 등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글귀를 나눠본다.

교수님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다면, 그 헌신이 잊히지 않도록 뭐라도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지금 아무리 소중해도 몇 년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 잊힙니다. 그러나 활자로 남겨둔 기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자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들을 그러모았다. 또한 이 기록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함께 일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록하고, 출판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 책을 낸 계기도 참 멋지네.


내가 전공한 '외상외과'라는 세부 전공은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중증외상센터 셀립과 운영을 고민해야 하는 과였다. 한국은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외상 환자가 수술이라도 받다가 사망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현실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길에서 죽어나가고, 이런 죽음의 기록은 '예방 가능한 사망률'이라는 허망한 숫자로만 표기될 뿐이다. 외상외과 환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들이고, 정책의 스포트라이트는 없는 자들을 비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불빛은 외상외과에 닿지 않았다.


의과 내에서도 인기과, 비인기과가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외상외과가 왜 인기가 없는지 절감하게 됐고, 또 얼마나 열악한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됐다. 스포트라이트 없는 어둡고 조용한 곳은 절실한 몇몇 사람들의 죽기 살기로 치열한 삶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외과 의사의 삶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뼛속 깊이 느낀다. 그 무게는 환자를 살리고 회복시켰을 때 느끼는 만족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터진 장기를 꿰매어 다시 붙여놓아도 내가 생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수술 후에 파열 부위가 아물어가는 것은 수술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이고, 나는 환자의 몸이 스스로 작동해 치유되는 과정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종 인공생명유지장치들을 총동원해 환자에게 쏟아붓는 것뿐이고, 그것은 치료를 '돕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덤덤함과 겸손함과 원칙이 읽는 내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덤덤함을 넘어 삶에 찌든 체념과 염세주의와 썩어 문드러진 심경도 착잡하게 읽힌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주장하며 굽히지 않는다, 안 될 경우를 걱정할 것 없다, 정 안 되면 다시 배를 타러 나가면 그뿐이다.....나쁜 보직을 감수할 자세만 되어 있으면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다. 원칙에서 벗어나게 될 상황에 밀려 해임되면 그만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단순한 논리였다.


그는 원래도 원칙주의자로 살아온 듯 보인다. 또 그의 주변인들에게서 기본과 원칙을 배우고 그 원칙의 삶을 더 단단히 다지고 단순하고 강하게 원칙을 밀어붙이고 살아간다. 혹여 그 원칙이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환자를 헬리콥터로 이송하는 것이나 의료진이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은 한국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수술한 환자도 한국이었다면 앰뷸런스로 이송되었을 것이고, 병원 도착 전에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나는 수술을 마친 포텐자 교수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헬리콥터로 현장에 출동하는 의사들에 대해 물었다. 그의 답은 선명했다.
네가 환자에게 가까이 접근할수록 환자를 살릴 기회가 많아질 거야 (The closer you get to the patient, the more likely you'll save the patient)


이 책을 읽고 '닥터 헬기' (의료시설을 갖춘 응급환자 이송용 헬기) 개념을 처음 알게 됐다. 이국종 교수는 닥터 헬기에 꽂혔고, 외상외과의 키(key)라고 생각했으며, 그 키를 잡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버텨야 하는가' '언제까지'버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스스로 직장을 물러난다는 무의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조직에서 나를 내치지 않는 한, 스스로를 깎아먹고 갉아먹으며 버티게 될 것이다.
나는 오만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위기 상황에서 교과서적인 원칙을 계속 생각하려고 애썼다. 주위 분위기에 잘못 휩쓸리는 순간 환자는 허무하게 생명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또한 갈 길을 잃는다. 나는 끊임없이 원칙을 생각했다.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살려내며 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병원비까지 떠안고, 병원 내, 외부까지의 비난과 공격의 총알을 받아내며 외롭고 치열하게 버티고 또 버티는 그. 그의 정신력과 인내, 굳은 심지와 원칙에...존경을 표한다.


20대 청년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괴로워하지 않았다. 좌절하는 대신 살아있음으로 가질 수 있는 나머지 가능성에 집중했다. 그 긍정이 놀라웠다. 그런 삶의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보며 나는 부끄러웠다. 2년 후 그 환자는 인공항문 복원 수술을 받았다. 환자는 더 쾌활해졌고 보조기를 착용하고 잘 움직였다. 그는 외래로 왔을 때 곧 취직을 할 거라고 내게 말했다. 그때 그 환자는 환하게 웃었다.


누구나에게나 힘든 일이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가지각색이다.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진다. 책에는 생사를 오가는 많은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죽음과 질병 앞에 무기력하거나 거칠게 맞선다. 또 어떤 이는 무한 긍정으로 삶을 돌파해 나간다. 나는 어떤 태도와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가.


모든 환자가 수술 이후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로 수술을 받고 비교적 쉽게 회복되는 환자들 가운데 불사조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하는 이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정말 사선을 넘어온 환자들은 분명 어떤 변화를 보인다. 극심한 신체 변화가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변화의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중환자실에 머무는 동안 집중치료 시 사용되는 고농도의 안정제와 진통제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사선을 넘나든 사람은 변할 수 있다'라는 점은 분명했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 골든아워 중 -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닥터헬기를 시급히 시행하고자 하는 거 같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골든아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단순하고도 선한 동기에 왜 그렇게 많은 이유와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건 내가 모르는 배후에 정치싸움, 돈문제, 비인기 외상외과 문제 등등 여러 문제가 얽히고설켜있는 거겠지...


나는 과연 잘한 것인가. 아니면 무모한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자원을 투입해가며 소모전을 벌인 것인가. 고요한 밤 창밖의 희미한 가로등을 보고 있으면 뒤엉킨 생각들이 때로 정리가 되었고 때로는 파편적으로 갈라져 나갔다. 현수엽, 정우진, 이병권, 이세형..... 미안한 얼굴들이 계속 떠올랐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으나 그 어떤 결론에도 닿지 못했다. 가장 쉬운 결말은 누군가 나서서 내 일의 종료 시점을 정해주는 것이리라. 내게 맡겨놓는 한 나는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고, 이 일을 지속하는 한 나는 위험한 상황을 좇는 본능에 따라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나는 단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답을 들어도 무엇도 선명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 골든아워 중 -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온 그 과정. 하지만 나의 상황이, 나의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쫄릴 것이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알게 모르게 자책감도 생기고... 그의 리얼 고민과 현실적인 상황과 결론. 힘에 부치는 그의 환경과 심경이 느껴진다. 답을 알 수 없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했던가! '위험한 상황을 좇는 본능'이라... 적어도 이국종 교수에게 있어서는 상황과 환경이 목표를 막진 못할 거 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제 그릇에 따라 견디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는 제 역량에 달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포개 놓은 그릇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내 그릇의 크기에 비춰볼 때 너무 많이 와버렸다. - 골든아워 중 -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 골든아워 중 -


최근에 말랑말랑한 글들만 보다가 이렇게 치열한 원칙주의의 글을 읽다 보니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됐다. 각자의 짐이 다 다르겠지만 생명과, 사람과, 공의의 짐을 진 그의 어깨는 특별해 보였다. 내가 맞보지 못한 치열함에 카타르시스도 느끼고, 일촉즉발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견딘 그의 심장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신념과 원칙과 그릇이 존경스러웠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후배를 위해 길을 만들어 놓고 가겠다. '크~~~' 꼰대는 많이 보았지만 이런 선배는 많이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겠다는.. 그 지점이 종착지가 될 거라는... 이국종 교수의 마지막 글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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