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미니민 Mar 25. 2019

'Girls can do anything'의 민낯

우리는 '여자'여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뭐든 다 할 수 있는 존재다

마지막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기 위해 캡틴 마블을 보고 왔다.

기존에는 없던 '캡틴 마블'이란 히로인의 등장에 더불어 평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혹자는 히로인이 섹시하지 않고, 예쁘지 않고,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블의 히어로와 대적할 만한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영화를 혹평하고 있고, 혹자는 여성을 성 상품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히어로와 대적하는 강한 히로인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열광하고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층위의 감상평이 많다. (스토리가 단지 재미없다, 그저 앤드게임을 위해 통과의례 상 본 내용밖에 되지 않는다는 둥..)

한편으로는 요새 같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성별 격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 분위기 덕에 나올 수 있는 영화라고 느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논쟁도 그러한 결에 맞춰서 나오는 부산물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캡틴 마블의 스토리가 재미있다고 할 수 없다고 느꼈고, 그중에서 제일 클리셰 범벅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지속적으로 '여자이기에', '인간이기에'라는 단어가 주인공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압박은 주인공에게 트라우마처럼 기억 한 편에 남게 되고, 극에서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스포 주의) 물론 주인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압박을 견뎌낸다.

여기서 나는 피앤*의 광고 한 편을 보고 나온 느낌을 받았다. 항상 동일한 방식의 메시지가 주제만 달라진 채로, 여자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고정관념을 극복하는 데 생리대든 화장품이든 여자들을 위한 용품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의 광고 말이다.


과연 남자 히어로 주인공들은 '남자이기에' 주인공이 성취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push를 주변에서 받은 적이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남자 히어로들은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유로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 아이언맨 심장의 전자석, 캡틴 아메리카의 윈터 솔져(?), 토르의 배 다른 동생 록키 등으로 전혀 전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굳이 본인의 약점을 들먹일 때 '남자'인 부분은 전혀 본인의 역량에 한계를 만들어내는 설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캡틴 마블이 단순히 '여자'여서 본인의 잠재력에 제약을 받아왔다는 설정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외계에서 온 미사일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한꺼번에 날아오는 미사일을 다 박살을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나타난 주인공에게 '여자'이기에 그녀가 갖고 있던 한계를 깨 버리게 한 것은 너무나도 밸런스 붕괴가 아닌가 싶다.

다른 주인공들은 본인의 아킬레스건은 아킬레스건 대로 가지면서 회를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새로운 고난을 맞이하는 데 비해 캡틴 마블은 '여자'여서 오는 핸디캡을 이번에 일찌감치 극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다음 캡틴 마블 영화는 생리통이든 임신과 출산이든 '여자'여서 근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을 들고 와서 캡틴 마블의 아킬레스건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여자'라서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는 결국 기울어진 경기장의 모양을 인정하여 차별적 관행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뿐이다.

기울어진 경기장을 인정하는 것은 우월한 위치의 경기장을 차지한 상대방에게 경기장이 평평 해지기 전까지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의를 베풀도록 강요한다. 물론 여자라서 좀 더 범죄의 위험에 노출이 되고, 신체적으로도 타고나길 남자보다 약한 존재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상대편이 호의를 베풀어주기를 강요한다면, 기울어진 경기장은 상대방에게 유리한 입지를 계속해서 내어줌으로써 기울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지위가 아님에도 이루기 힘든 성취를 얻어냈음을 강조하는 것은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가 가능한 사실을 정당화한다. '워킹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좋은 학교를 보내면서 본인 또한 직장 내에서 성공을 했다든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간 케이스등을 강조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에게 '여자'임에도 사회의 기준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함을 강요하는 스토리밖에 되지 않는다. 즉, 차별 여건이 없는, 강자의 논리만 강화할 수 있는 사례를 양산하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렇기에 여권이 진정으로 남자들과 동등한 지, 사회적 불평등이 없는지를 논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역차별을 단행하는 것만큼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취를 이뤄낸 부분에 대해 '여성'의 성별이 핸디캡이었음을 부각하는 것이 과연 여권에 도움이 되는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여자라서', '여자이기에'가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란 단어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요인이 아니길 바란다. 또한 사회가 '여성'을 모두 그룹핑하여 '여성'이란 그룹을 단편적인 시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개별 여성의 다양한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사같은 너님은 평생 그렇게 사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