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의 전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가시가 박혔다. 자려고 누웠는데 엄지손가락이 부어오르는거다.
‘괜찮겠지’하고 왼쪽 엄지손톱과 검지손톱으로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누르는데 조금 더 파고드는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검은 점이 박혀 있는데, 내가 집중해서 봐도 뭐가 박혔는지 보이지 않는 거다. 일단 컵에 엄지손가락을 담궈 손을 불려 보았다. 15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나올 생각은 없고 팅팅 부었다. 여기에 집중하면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 여드름 패치를 붙였다. 여드름 패치는 작고 동그랗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잘 불려져 빠져 나올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어났지만 달라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자꾸 신경만 쓰였다. 점점 더 후끈하고 아팠다. 이 작은 것이.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처다. 남에게 들여다 봐달라고 말해야, 그리고 그 상대가 집중해서 혹은 정말 견고하고 정밀하게 봐야만 보이는 것이다.
마음 속에 상처가 그런 것 같다. 어디에서 어떻게 박혔는지 무엇이 박혔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아프다고만 그리고 빼내려고 할 수록 점점 더 깊이 들어 간다고 자꾸만 주변이 부푼다고.
근데 사람들이 민간요법을 알려 준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된다. 그게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휘둘리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나도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나 내가 어떻게 아프고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말을 하고 있나 들여다 본다.
명절 당일 아침 일부로 설거지를 자처 했다. 약 20인분의 떡국과 반찬 그릇 수저 그리고 냄비 까지 많은 양이 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려서 가지를 빼내겠다는 의도를 갖고 했다. 내 딸 귀하다고 너무 귀해서 안 시키고 싶다고 했지만, 좋은 핑계거리였다. 손을 일부로 불려서 빼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보다 모두가 편하게 생각해 좋다. 나도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웠다.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던거다.
그리고 올케한테 가서 ‘언니 저 여기 뭐 박힌 거 같은 데 보여요?’, ‘어머, 네, 쪽집개가 있을런가?’ 그래서 시골집에 쪽집개를 찾았고 나를 신경 쓰이게 하던 가시를 올케가 뽑아줬다. ‘어머 생각보다 크네요.’ 하고 정말 1mm정도나 되는 두께의 가시를 뽑은 언니는 ‘아이고 아팠겠다’ 라고 했다.
사실 뽑고 나서도 주변이 부어있어서 만지면 얼얼 했다. 그런데 올케가 “아팠겠다”라고 한 말에 온 신경이 닿아있던 엄지손가락에 신경 썼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내 상처가 어떠했는지 깊이 들여다 보고 공감 해 준 그 한마디. 나는 24 시간을 고통스러워 했던 것들이 별 게 아닌 게 되었다. 그리고 연휴 다음날까지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다. 하지만 뽑고 나니 부었던 손가락은 금새 가라앉았다.
우리는 큰 결정과 작은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마치 가시가 박힌 것 처럼 고통스러워 하고 아득바득 노력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복기한다. ‘이거 어디서 박힌거지?’, ‘뭐 하다가 박힌걸까?’, ‘난 한 게 없는데?’, ‘아 이거 뭐야?’ 등등 상처에 대한 해결 보다 자꾸만 그 실체를 찾아가려고 한다.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픈 손가락을 자꾸만 눌러 본다. 만질수록 더 주변은 번지고 더 붓는데 말이다. 불리는 시간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불릴 생각보다, 빼낼 생각을 훨씬 더 먼저 한다.
분명히 빼 내는 게 먼저 얘긴하다. 하지만 불려서 빼면 조금 더 쉽게 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깝다고 계산 해 버린다.
빼고 나서도 약간의 얼얼함과 붓기가 있다. 우린 그걸 계속 만진다. 괜한 느낌. 묘한 촉감 때문이겠지.
시간이 지나면 붉은 자국만 있을 뿐 어제의 그 부품과 흔적은 없다.
우리는 상처를 바라 보며 그렇게 행동 한다. 상처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처가 났는지 어디에서 상처가 났는지 이게 왜 나에게 벌어지는 일인지 자꾸 복기 한다. 하지만 그럴 수록 상처만 더 깊어지고 문제는 해결 되지 않는다. 결국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귀찮을 감수 할 불리는 시간도 필요 하겠지. 이건 남이 해줄 수 없다. 내 스스로 해내야 한다.
불순물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음이 어지러울 땐 가만히 가라앉히는 법도 배우 듯이.
그리고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 잘 들여다 보지 못하고 입만 놀리는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안 된다.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거 이렇게 하면 된다던데. 저거 저렇게 하면 된다던데’ 라는 경험 없는 말들 주변에 떠도는 말들을 전 하는 사람. 그런 말들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후에는 잠시 기다려야 한다. 그 상처도 분명 자리 하고 있었던 부분 이기 때문에 그 사이를 메꿔줄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상처에게도 집중의 전환이 필요하다. 상처에게도 집중 중에 선택이 필요하다. ‘왜 이런 상처가 났지?‘의 선택이 아니라, ‘정확한 상처’를 인식하고 치료 방법을 선택 하는거다. 반드시 고통은 수반 된다. 그 고통을 또 선택하는 거다. 내가. 치료 과정에서 나는 명확한 치료 에만 집중하도록 선택해야 한다. ‘이게 맞아?’를 의심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선택을 한순간 나의 치료는 도돌이표다. 그리고 회복도 선택 해야 한다. 어떤 회복을 할 것인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선택이다.
각자 생긴게 다르고 유전이 다르다. 따라서 회복력도 다르다. 같은 부모에게서도 다르고, 부모에게 나왔지만만 자녀는 또 다르다.
나는 살성이 약하고, 회복도 더디고, 흉이 잘 나는 반면 엄마는 큰 수술을 하고 나서도 아무도 수술한지 모르게 살이 도톰하고 잘 붙는다.
그러니 엄마가 전문가가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내 상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선택에 따라 어떤 회복을 할 수 있느냐 에 따라서 나의 마음은 자리잡는다.